사데크 헤다야트 「눈먼 올빼미」 후기: 우울과 광기의 간접체험
REVIEW/BOOK REVIEW 2025. 5. 28.
사데크 헤다야트 「눈먼 올빼미」 후기: 우울과 광기의 간접체험
독서모임 8주 차의 책,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올빼미」. 내가 살면서 페르시아어 문학까지 읽어보게 될 줄이야.
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로 표지랑 제목만 보았을 때는 어떤 판타지스러운 소설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책을 펼쳐 보았을 때 내용은 전혀 판타지가 아니었다.
이 책을 한 줄로 말하자면 죽음에 직면한 주인공이 자신의 어둡고 혼란스러운 자아를 성찰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의 날것으로 표현한 글이다. 이 '죽음'은 실제 죽음일 수도, 아니면 어떠한 정신적인 죽음일 수도 있다. 그 표현들이 너무 사실적이어서, 어쩌면 「눈먼 올빼미」는 단순한 소설이 아닌 작가의 자아가 그대로 투영된 자전적인 이야기라고도 느껴진다.
특이하게 책의 앞머리에는 작가 사데크 헤다야트의 일생이 생각이상으로 길게 소개되어 있다. 작품 본문이 아니다보니 대략적으로 휘리릭 읽기는 했는데 상당히 고단한 인생을 살아오고 깊은 좌절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쿠데타 정권이었던 이란에서 핍박받고 다른 나라로 망명해 작품 활동을 이어오던 그의 일생은 죽음으로 끝난다. 때로는 책이 쓰인 배경을 알아야 더 잘 읽히는 소설들이 있기 마련인데, 「눈먼 올빼미」가 특히 그랬다. 만일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작가의 삶을 아예 알지 못했더라면 소설을 읽으면서 '무슨 이런 미친 사람이 다 있지?' 싶었을 것이다.
책의 내용은 정말 어려웠다. 문장 하나하나가 어려운 건 아니지만 내용 자체가 의식의 흐름 기법에다가 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알 수 없게 난해하게 쓰여 있다 보니 내용이 길지 않더라도 읽어 내려가는 시간은 상당히 오래 걸렸다. 이야기를 이루고 있는 서사는 길지 않다. 등장인물은 화자와 그가 갈망하는 여인,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의 언청이 노인, 푸줏간 주인, 유모, 부모님 등이 나오지만 이들은 각각 개별로 존재하지 않고 어떨 때는 존재가 합쳐지고 분리되기도 한다. 한 여자를 죽이고, 다시 같은 방에서 되살아나고, 친어머니의 묘사가 처음 등장한 여자와 묘사가 같다가도, 그의 아내까지도 같은 묘사를 하기도 한다. 주인공 또한 노인과 대화를 나누다가도 노인과 동일시되고, 푸줏간 주인도 마찬가지다.
이런 유형의 소설은 처음 접해봐서 상당히 혼란스러웠지만, 그나마 이러한 내면의 혼돈을 재현한 영화를 몇 편 본 적이 있었기에 그와 비슷한 흐름으로 책을 이해했다.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들과 무한히 반복되는 상황은 실재하는 상황이나 꿈보다는, 주인공의 내면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분열된 자아가 아닐까? 꼭 이중인격자 같은 독특한 존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모두 다양한 자아를 가지고 살아간다. 나만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으면서도 어떨 때는 모든 시선에서 해방되어 혼자 있고 싶어 하기도 하는 것처럼, 인간이라는 존재는 딱 하나로 정의 내리기 어렵다. 이와 같이 사데크 헤다야트 또한 다양한 자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개혁을 꿈꾸었다가 좌절한 적이 있었더라면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상당했을 것이다. 그러한 혼란스러운 내면과 우울감이 소설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령 주인공이 '매음녀'라고 칭하는 그의 아내. 난데없이 아내를 보고 그런 저속하고 성차별적인 발언을 하는 것에 있어서는 참 할 말이 많지만 일단은 묻어두기로 하자. 화자는 아내를 한없이 경멸하고 증오하다가도 어떤 때는 한없이 그녀를 갈구한다. 이런 아내가 나는 주인공의 '이상'처럼 느껴졌다. 아름다운 언어로 쓰인 글들은 역겹다고 말한 대로 자신이 느끼는 추악한 밑바닥의 감정까지 있는 그대로 표현한(가끔 이런 것들을 보고 나는 표현보다는 '배설'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결과가 아내인 것이다. 주인공의 입장에서는 이상을 좇고 싶지만 그게 되지 않으니, 자신과 달리 이상을 잘 따라가고 있는 다른 이들을 질투하면서도 가지고 싶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분노하고. 이런 총체적인 감정들이 아내이자 처음 등장한 여인이자 그의 어머니라고 생각했다. 비슷한 흐름으로 언청이 노인이나 푸줏간 주인 또한 주인공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특히 아내와 불륜 관계에 있는 언청이 노인을 생각보다 그리 나쁘게 보지 않는다는 게 더욱 동일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요소였다.
덕분에 한 사람의 마음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침잠하는 우울을 간접 체험하게 되었다. 마치 영화 레퀴엠을 보고 마약 중독자의 삶을 간접 체험한 것처럼. 읽기 힘들었으나 내가 영화로만 보았던 기법을 책으로 처음 읽게 되니 새롭기도 했다. 비록 내가 이러한 소설은 취향이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어떠한 서사가 있는 소설이 훨씬 좋다. 끝없이 자신의 자아를 탐구하기만 하는 내용은 흥미가 없다. 특히 이렇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아픔을 그대로 드러내고 죽음을 이야기하는 소설을 읽다 보면 나까지도 그의 우울에 잠식되는 것만 같으니까. 나로 말하자면 늘 죽음을 멀리하고 싶어 하고 영원히 살고 싶어 하고 세상에는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고 생각하며 살아오기에 주인공과는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이런 나에게 갑자기 다가온 '죽음'에 대한 고찰···은 사실 부정적이지만은 않았다. 늘 죽음을 두려워하던 나에게 조금은, 아주 조금은 친숙하게 다가왔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이 책의 결말이 뭐 어쨌다고! 라고 말하기에는 내용 자체가 그저 자신의 성찰이고 자신의 괴로움을 표출하고 싶었던 거로 보이기에 '그렇군요. 많이 힘드셨겠어요.'라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다.
삶에는 서서히 고독한 혼을 갉아먹는 궤양 같은 오래된 상처가 있다. 이 상처의 고통이 어떤 것인가 타인에게 이해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책을 모두 다 읽고나서 다시 앞으로 돌아가 읽은 첫 문장. 이것이야말로 소설의 전체 내용을 관통하는 한 문장이었다.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는 깊은 생각 없이 지나쳤던 문장인데 이 얼마나 심오한 문장인지. 많은 사람들의 내면에는 궤양이 존재하고 이는 치료하기 쉽지 않기에. 고통을 묻어둘 다른 방법을 찾아서 노력해야 할 뿐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주인공이 선택한 방법은 타자를 향한 폭력성이었다. 그는 아내를 매음녀라고 비하하고 가지지 못할 바에야 죽이고 싶어 한다. 설령 그 존재가 자신의 일부를 객체화한 존재라 할지라도 나는 옛 작품에 툭하면 등장하는 여성혐오적인 표현들이 너무 불편하다. 그래, 옛날 작품이니까 그렇겠지. 라면서 흐린 눈을 하고 읽어 내려가기는 했지만 내용을 완독한 지금 짚어야 할 지점은 짚어야 하니까. 견딜 수 없는 한계의 끝까지 몰린 인간이 얼마나 바른 사고를 할 수 있겠냐만은 그것이 괜찮다고 용인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불륜은 무슨 여자만 하나? 언청이 노인과 밀회했다는 언급은 나오면서 결국 그가 찔러 죽이는 건 여자 쪽이다. 남자에게는 아무런 소리 하나 하지 못하고 저보다 신체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대상에게만 쏟아지는 폭력은 그가 아무리 힘든 상황에 있다 한들 이해될 수는 없는 법이다.
「눈먼 올빼미」는 서구에서 극찬받는 반면, 정작 사데크 헤다야트의 고향인 이란에서는 지금까지도 금서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이슬람을 모독하는 표현이나 비뚤어진 성적 표현들, 그리고 당시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듯한 내용들이 문제가 되었나 보다. 책을 읽고 실제로 자살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고 하는데 물론 내용 자체도 상당한 우울감이 배어 있기도 하지만 독서 모임에서 나왔던 이야기처럼 책이 나왔던 당시의 사회가 너무나도 비극적이고 처절했기에 그러한 배경과 맞물려 일어난 일이 맞지 않을까 한다. 21세기의 지금 「눈먼 올빼미」를 읽고 자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혼자만의 사유를 하면서 이렇게 긴 내용을 뽑아낼 수 있을 정도라면 대체 작가는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담고 살았는지 감이 상상도 가지 않는다. 과연 책을 써내려가면서 그는 자신의 글에 치유되었을까? 아니면 죽음을 더욱 갈망하게 되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존재했다고 받아들이는 일뿐이다. 이 책을 단순히 '뭐야, 왜 이래. 미쳤어?'라고 치부해 버릴 수 없는 까닭은, 나 또한 마음 한구석에 작가와 같은 어두운 면이 자리하고 있어서다. 모든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후기는 기억에 남는 문장들의 발췌로 마무리하겠다.
과거의 인간들의 행동, 사상, 열망, 관습은 그러한 이야기라는 수단을 통해 후세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이야기들은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가 아닐까?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똑같은 말을 하고, 똑같은 성행위를 하고, 똑같은 유치한 걱정으로 자신을 괴롭혀 왔다. 삶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터무니없는 이야기, 말도 안 되는 멍청한 긴 사연이 아닐까?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것도 그런 허구의 개인적인 단면이 아닐까? 이야기는 목적을 이루지 못한 열망의 배출구일 뿐이다. 화자가 과거 세대에게서 물려받은 제한된 정신적 범위 안에서 품은 열망의 배출구.
나는 기도서 따위는 필요 없었다. 기도서뿐 아니라 속물들의 사상을 표현한 어떤 종류의 문학작품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헛소리와 거짓말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게 자신들의 경험을 물려준 오랜 과거 세대들이 빚은 결과물이 바로 나 자신 아닌가? 내 안에 과거가 존재하지 않는가?
생을 살아가는 동안 내내 죽음은 우리에게 손짓한다. 누구나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생각에 빠져들고, 그 속에 깊이 잠겨서 시간과 공간의 관념을 상실하고,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정신이 돌아온 후에도 자기가 속해 있는 외부 세계를 다시 자각하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죽음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것이다.
삶에는 서서히 고독한 혼을 갉아먹는 궤양 같은 오래된 상처가 있다. 이 상처의 고통이 어떤 것인가 타인에게 이해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믿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평범하지 않은 일'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 몰이해의 원인은 인류가 아직 이 병에 대한 치료법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술을 마신다거나 마약의 힘을 빌려 고통을 잊는 것만이 이 병의 특효약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효과는 일시적이다. 어떤 시점이 지나면 고통이 완화되기는커녕 오히려 심화될 뿐이다. 일상적인 경험을 초월한 이 병의 비밀을 어느 누가 파헤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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