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te Light Pink Flying Butterfly 이문열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3. 성장과 눈뜸」 후기

이문열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3. 성장과 눈뜸」 후기

REVIEW/BOOK REVIEW 2025. 5. 2.

 

독서모임 4주 차 주제는 '아버지'. 이 주의 메인 독서는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이긴 했으나, 사실 모임에서 선정된 소설은 후앙 기마랑스 로사의 「제3의 강둑」이라는, 아주 짧은 단편 소설이었다. 이 단편이 실려 있는 책이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3. 성장과 눈뜸」이라는 책이었다. 1996년 초판인 이 오래된 책에는 「제3의 강둑」을 비롯해 총 10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었다. 어차피 책을 빌렸는데 굳이 그 짧은 단편만 읽고 반납할 필요가 있나. 더군다나 그다음 주의 모임 주제는 책이 아닌 영화였기에 선정된 책이 없었으므로, 빌린 김에 이 책에 실린 단편을 전부 읽어보기로 했다.

 

서문에 적혀 있는 대로 유명한 작가가 글쓰기를 위한 좋은 전범을 추렸다고 말하듯 대부분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 다만 책의 부제처럼 인간의 성장, 그리고 깨달음에 관련된 소설만 모아놨다 보니 단편들을 연속으로 읽다 보면 내용이 비슷하게 겹치는 감이 있다고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듯하다. 그래도 책 한 권으로 잘 쓰인 소설 여럿을, 심지어 이문열 씨가 선별한 소설을 다양하게 읽을 수 있는 점은 좋았다. 다음에는 세계명작산책의 다른 시리즈 중 책 두세 권을 빌려서 교차해서 보면 어떨까 싶다.

 

 

「조니 파이와 바보귀신」 - 스티븐 빈센트 베네

삶에 대한 눈뜸과 죽음과의 친화

 

인생을 바보귀신에게 쫓겨 다닌 조니 파이의 이야기. 인간이 살아가는 삶과 고민을 동화적으로 표현한 분위기가 좋았다. 이 바보 귀신은 조니 파이가 상상에서 만들어낸 존재인지 아닌지 불분명하지만, 조니 파이가 자신의 삶에서 옳게 나아가기를 부추기는 추상적인 존재로 보였다. 조니 파이가 아니더라도, 바보귀신이 자신을 찾아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더라도 누구나 자신이 어떻게 주어진 삶을 옳게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할 것이다.

 

"나는 누군가에 의해서 바보라고 생각되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아."

 

주인공 조니 파이의 말처럼 사람은 어느정도 바보 같은 구석이 있어야 바로 인간이지 않나 싶다. 완벽한 인간이라는 존재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토니오 크뢰거」 - 토마스 만

길을 잘못 든 속인의 자기 성찰

 

이 중편을 읽으며 왠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많이 생각났다. 이마의 낙인이며, 두 세계며······. 창작을 하지 않는 독자로서 작가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삶을 살아갈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일부를 이 중편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 

 

주인공 토니오 크뢰거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사뭇 다른 소년이다. 다른 친구들처럼 승마를 즐기지도 않고, 무도회에서도 숫기 없는 모습과 함께 실수를 하기도 한다. 그가 많은 이들에게 '정상'이라고 일컬어지는 행위에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할 때마다 안타까움이 일었다. 차라리 다른 사람들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편이 좋을 텐데 말이다.

 

다행히도 토니오 크뢰거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일을 계속하며 유명 작가의 반열까지 오른다. 하지만 예술과 세계에 대한 그의 고민은 끊이지 않았다. 사람은 정말 끊임없이 고민하고 반추하는 존재구나. 그가 푸른 눈과 흘러내리는 소맷자락을 사랑한 건, 자신과는 달리 세상을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따금 나도 창작물을 보다 보면 창작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어느 순간 분석하려는 행동을 무의식 중에 취하기도 하니, 토니오 크뢰거의 고뇌가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을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는 눈길조차도 결국은 사랑이 아닐까?

 

문학이란 참 신기한 매개체다. 작가가 비관과 우울함을 품고 써 내려간 글이 독자들에게는 위안이 되어주고 힘이 되어줄 수 있다니. 그런 걸 보면 세상은 참 다채롭고, 어느 일면만이 전부인 건 인간이든 사물이든 창작물이든 하나도 없다. 

 

 

「약혼녀」 - 안톤 체호프

애처롭고 아름다운 눈뜸의 이야기

 

이 책에 실린 소설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단편이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려는 여성을 보면 심장이 뛰는 내 주관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기도 했다.

 

주인공 나쟈의 첫 등장은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여성으로서 자신의 삶에 드리운 불합리와 의지가 무시된 전통적인 관습을 그대로 답습하려 한다. 이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 준 존재는 바로 사샤다. 하지만 결국 주변 사람의 도움이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선택해야 하는 건 본인이다.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둘러싸고 있었던 것들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길에 발을 내디딘 나쟈의 용기가 정말 대단해 보였다. 많은 사람들에겐 그런 결단을 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기에. 사실 처음에는 막무가내로 마차를 타고 떠난 나쟈가 죽진 않을까, 실패하진 않을까 많은 걱정을 했지만 여자 혼자 굳건히 살아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또한 내가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문제를 어느 순간 깨닫게 되는 장면도 인상 깊었다. 지나고 보면 나 또한 지금 생각해 보면 분명 잘못된 것인데 옛날에는 용인되어 온 사회현상을 아무런 문제 없이 받아들이다가 어느 순간 사소한 계기로 깨달아버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신을 이끌어준 사람들이 나보다 못하다 여겨지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마치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샤처럼 말이다. 나 또한 어릴 적에 대단해 보였던 이가 지금은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 현상을 겪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들 또한 인간이 아니지 않나. 그리고 아무리 내 주변에 어떠한 누군가가 있다 한들 그로부터 깨닫고 선택하는 건 나 자신이므로 그들에게 느꼈던 경이까지 지워질 일은 아닐 것이다.

 

 

「나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 프랭크 오코너

정신분석의 명쾌하고 재치 있는 형상화

 

사실 제목부터가 나에게 불길함을 가져왔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니. 그리스 신화를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알 법한 이 용어는 아들이 어머니를 사랑하는 현상을 가리키지 않나. 때로 고전 소설을 일독하다 보면 심심치 않게 막장 로맨스가 대거 등장하기도 하기에 이 내용 또한 내 취향이 아닐까 봐 걱정하면서 페이지를 펼쳤으나, 이건 그저 나의 기우였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단편은 이전에 말한 「약혼녀」지만 가장 재미있고 흥미롭게 읽었던 건 「나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였다. 주인공이 어머니에게 가지는 애착의 발전이 나로서 상당히 납득이 가는 흐름이었고, 어머니를 두고 아버지와 신경전을 벌이는 구도도 흥미로웠다. 물론 아들이 어머니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성애적인 감정을 가졌다고 생각이 들진 않고, 아버지 또한 주인공을 진심으로 경쟁 상대로 느끼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결국 집안에 갓난아이가 태어남으로써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갈등 해소는 익살스러우면서도 충분히 우리 삶에 있을 법한 내용이었다. 인간관계란 이렇게 순식간에 뒤바뀌기도 한다.

 

 

「애러비」 - 제임스 조이스

상처 혹은 고통으로서의 눈뜸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내용을 읽었을 때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나에게 확실히 전해지지 않고 뒤에 붙은 서평을 읽고 나서야 '이런 내용이구나' 할 수 있었다. 물론 문학이란 받아들이는 사람 나름이라지만 아직은 내가 글의 주제를 파악할 능력이 부족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주제를 떠나 주인공이 사랑에 빠져서 겪는 환희와 고뇌, 서운함과 쓸쓸함이 서정적인 문체로 잘 담겨 있어서 그 표현들에 주목하면서 읽었다. 어릴 적에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으로 어른이 되고 나서보다 훨씬 벅차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무모한 일도 하지 않는가. 

 

애러비는 「더블린 사람들」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한 챕터 중 하나라는데, 이 책도 민음사 책에 있더라. 나중에 읽어볼까 싶다.

 

 

「늙은 소년 액슬브롯」 - 싱클레어 루이스

엉뚱한 늙은이의 신선한 눈뜸

 

삶의 깨달음이란 나이에 상관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액슬브롯은 지난한 젊은 시절을 일로만 보내고 60대의 할아버지가 된 후에야 세상에 대해 눈뜨게 된다. 그 나이를 먹고 순수한 '배움'을 위해 대학에 들어가려 공부에 매진하는 것 자체가 참 대단하지 않나? 노인이 되어서야 공부가 하고 싶어 검정고시를 보는 우리나라의 소수의 노년층들을 생각나게 했다.

 

액슬브롯은 대학교에서 본, 점수와 실적에만 매달리고 참된 공부를 하지 않는 학생들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이를 보며 마음 편히 액슬브롯에게 동감할 수가 없었다. 나 또한 대학에 들어가 점수에 연연하지 않았던가. 정확히 말하자면 대학에 들어간 일부터가 액슬브롯의 시선에서는 불손했을 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고 이 나라는 대학 학위가 없으면 뭣도 안 되는 세상인걸. 그렇다고 해서 대학교 때 얻은 것들을 생각하면 입학 자체를 후회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마음이 맞으면 나이 따위는 하등 상관이 없나 보다. 액슬브롯은 다른 사람들에게 단순히 '풍류객'이라고 비난받는 길버트라는 학생을 만나 함께 꼬박 하루와 밤을 보내고, 그제야 자신이 바라던 꿈을 이루었다 생각하며 다음날 대학을 떠난다. 나라면 기뻐서 계속 길버트의 옆에 붙어 다녔을 텐데. 이것이야말로 서평에 나와있듯 나이를 먹어 체득한 관록인가 보다. 떠나갈 때를 알고 떠나갈 수 있는 용기와 판단을 나도 배우고 싶다.

 

 

「시인」 - 헤르만 헤세

추상의 절심함과 아름다움

 

처음에는 몰랐는데 읽다 보니 예전에 읽은 소설이었다. 헤르만 헤세의 환상 동화집에 이 단편이 실렸었는데, 이 책에 실린 번역이 훨씬 더 어려운 어휘를 구사한 것 같다. 아무튼.

 

싯다르타에서도 느꼈지만 헤르만 헤세는 뭐랄까, 동양의 철학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었던 듯하다. 「시인」 또한 중국의 '한혹'이라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심지어 내용 또한 단순 소설보다도 동양 설화처럼 쓰여 있어서 처음에는 이게 헤르만 헤세가 창작한 소설이 맞는지 긴가민가하기까지 했다.

 

「데미안 」도 그렇지만 시인 또한 하나의 성장 소설이며, 현실인지 아닌지 모호한 추상성으로 작품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독자들로 하여금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것 같다.

 

 

「제3의 강둑」 - 후앙 기마랑스 로사

외로운 떠돎으로서의 삶

 

독서모임에 선정되었던 단편이 바로  「제3의 강둑」이었다. 다만 이 단편집에는 '성장과 눈뜸'이라는 주제로 담겼지만 독서모임에서의 주제는 '아버지'였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등장인물이 홀로 배에 타 강에 떠다니는 장면은 어쩐지 예전에도 읽은 적이 있다는 기분이다. 하여간 가족이 뭐라고. 다른 가족들도 다 아버지를 떠나갈 때 주인공만은 그의 곁에 남아 아버지를 뒷바라지한다. 아버지가 뭍을 떠나 홀로 영원히 강 위를 떠다니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그가 주어진 역할에 지쳐 떠나간 것처럼 보았는데 마지막에 아들이 자신이 대신 배에 타겠다고 할 때 그제야 돌아오는 걸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뒷부분은 또 반대로 아버지가 다가오는 모습이 아들 또한 아버지가 걸어온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보이기도 해 무섭기도 했다. 왜 도망쳤는지 알 것 같달까.

 

내용이 모호한 만큼 독자들에게 여러 방면으로 읽히는가 보다. 일례로 우리 독서모임 회원 중 한 명은 아버지가 이미 죽은 것이라고 보고 내용을 해석했는데 듣고 보니 이 또한 제법 그럴듯한 해석이었다. 

 

제3의 강둑은 무얼 뜻하는 걸까? 아버지는 두 강둑 사이에 있었다고 했지. 그렇다면 제3의 강둑은 주인공의 앞길을 막고 있는 아버지를 가리키는 건 아닐까? 아! 혈육이 대체 뭐라고. 가족에게 저 정도로 의무를 가져야 하나.

 

생각할 거리가 많은 건 좋지만 나는 그래도 답이 명확한 편을 좋아하곤 한다.

 

 

「보트 속의 남자」 - 에이빈트 욘손

환상 혹은 신비적 체험으로서의 눈뜸

 

죽음에 대해 모르던 아이가 처음 죽음을 목도하게 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쳐 눈뜨게 되는 이야기···라고 한다. 사실 이렇게 바로 이해하진 못했다. 이 또한 서평을 통해······. 아, 책 좀 많이 읽어야 하려나 싶다. 

 

사실 나는 주인공보다 한 살 많은 친구인 '하칸'을 추상적인 존재로 봤다. 완전히 실재하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어린 주인공의 앞잡이가 되어준 이정표와 때 묻지 않은 동심으로 보였달까. 때문에 하칸이 남자를 따라 떠나는 건 주인공이 성장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데미안이 싱클레어의 곁을 떠났던 것처럼 말이다(책을 워낙 안 읽어서 그런지 대부분의 예시와 비유가 데미안인 내가 안타깝다).

 

하지만 서평을 읽으니 죽음에 대한 눈뜸이라더라. 이게 더 맞는 말 같다. 그나저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이렇게 소설로 표현해 내다니. 작가란 대체 뭘까? 너무 대단하기만 하다.

 

 

「순직한 영혼」 - 귀스타브 플로베르

단순하고 소박한 영혼의 궤적

 

처음 내용을 읽게 되었을 때는 이 순직이 殉職인 줄로만 알았는데 純直이었다. 난 또 누가 업무 중 사망하는 줄로만 알았지. 

 

주인공 펠리시테는 평범한 하녀다. 그녀는 나아가는 삶 곳곳에서 애정하는 대상을 만든다. 약혼자, 부인의 자녀들, 앵무새······. 하지만 이들은 모두 떠나간다. 각자의 사정으로,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죽음으로. 

 

왜 사람은 자신과 함께 하고 싶은 존재와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없는 걸까? 학창 시절만 하더라도 늘 나의 곁에 있을 줄 알았던 친구들은 이제 저마다의 길로 떠났고,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연락하는 시도처럼 조금의 노력이라도 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영 만날 수 없다. 그 사실이 너무 슬퍼 펠리시테의 방에도 버리지 못한 수많은 물건들이 쌓이게 된 건 아닐까? 범인의 삶을 담담하게 표현했지만 그 담담함이 오히려 슬프게 다가왔던 것 같다. 모두가 다 함께 영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삶이란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