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te Light Pink Flying Butterfly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후기: 작은 물방울 하나도 파문을 이루듯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후기: 작은 물방울 하나도 파문을 이루듯

REVIEW/BOOK REVIEW 2025. 6. 3.

 

 

「이처럼 사소한 것들」 후기: 작은 물방울 하나도 파문을 이루듯

 

삶이란 사소한 것들의 연속이다. 세상은 내가 무심코 지나친, 눈에 띄지 않는 많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때로는 내가 건넨 작은 손길이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뒤흔들 만큼의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모여 크고 아름다운 화단을 이루듯이 작은 것들이 모여 새로운 무언가를 탄생시키기도 한다. 에세이 「사물의 뒷모습」에서 안규철 작가가 기록했듯, 하나하나의 씨줄과 날줄이 엮여 천을 이루는 것처럼 우리의 지나온 시간과 머물렀던 공간, 행동과 언행, 스쳐 지나갔던 많은 것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나'라는 천을 짠다. 단순히 얇은 실 하나만 빼들면 볼품없지만 실 한 올이 엉키면 천이 망가져버리는 것처럼, 그만큼 사소해 보이는 것들도 우리의 삶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이미 5월 초에 순식간에 읽어내려갔던 책이다. 책을 끝까지 읽어 내려가고 나서야, 이 이야기가 처음부터 아주 조심스럽고 섬세한 문장들로 쓰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독서 후기를 쓰기 전 한 번 더 내용을 읽으며 내가 놓쳤던 암시를 읽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이 내 마음대로 흘러가나. 독서 모임에서 꾸준히 읽어야 하는 책들도 많았고 다른 일들도 많아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책을 다시 읽었다.

 

요즘은 세상이 날 가만히 흘러가게 두질 않는다. 12월 3일 내란 사태도 그렇고, 고른 책들과 콘텐츠들이 나보고 자꾸만 양심적으로 살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한 강 작가의 책들도 그렇고, 내가 요즘 밥 먹을 때 즐겨 봤던 드라마 「굿 플레이스」도 그렇고, 독서 모임에서 읽었던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도 그렇고, 이 책도 그랬다. 글쓰기란 스스로의 자아를 돌아보고 실현하는 방식으로도 기능하긴 하지만, 나는 최근 들어 책 한 권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런 영향력이 없었더라면 「소년이 온다」가 탄핵안에 인용되지도 않았을 테고, 내가 저 멀리 파라과이에서 일어난 일들이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흘러갔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며, 영영 막달레나 수용소에 대해서 몰랐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아일랜드에 존재했던 막달레나 수용소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 내막을 샅샅이 파헤치고 고발한다기보다는, 자그마치 수녀원이라는,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정신적인 공간에서 자행된 끔찍한 일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욱 가깝겠다. 책을 읽기 얼마 전 소설 「더블린 사람들」의 일부를 읽었던 나는 이 책도 아일랜드 배경이라는 사실도 알고 반가웠으나(그 외에도 한국인으로서 단순한 영미문학보다 아일랜드 배경이라고 하면 반가울 수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첫 시작에 쓰인 문구를 보고 나서 다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 주인공 빌 펄롱이 살아가는 마을의 사람들은 모두가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면서도, 일면으로는 살기 팍팍한 이들은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석탄 야적장에서 일하는 빌의 가족은 쉽게 외벽 창을 바꿀 수 있을 만큼 사치스럽지는 못해도 아내와 다섯 딸을 충분히 부양할 수 있을 만큼의 경제력을 갖춘 집이다. 모두가 들뜨고 한 해를 마무리하느라 바쁜 시기, 빌은 쉽사리 마음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한다. 작중에 묘사되는 그의 생각을 보면 빌은 평소에도 꽤나 생각이 깊은 사람 같았다. 그만큼 자신의 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챙기는 데에도 많은 신경을 쓰곤 한다. 아이에게 잔돈을 쥐여주고, 외상으로 달아달라는 손님들의 요구를 받아주며, 집안의 생계가 빠듯하지 않을 때 고객이었던 집에 조용히 장작을 두고 오기도 했다. 

 

그런 빌의 큰 고민은 수녀원에서 맞닥뜨린, 바닥을 닦고 있던 아이들을 보았던 것에서 시작된 것 같다. 맨 처음 책을 읽을 때는 놓치고 지나가서 몰랐는데 빌이 수녀원에서 죽고 싶어하는 여자 아이들을 보았던 때는 수녀원에 과일이 매달려 있던 시기였으니 몇 달 전의 일이었다. 그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지나친 것이 그의 마음속에 계속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까지 빌은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생각을 해야지. 생각도 안 하고 기계처럼 살면 그게 부품이지 사람이야? 세상은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 바꾼다고. 그런 그는 추운 겨울 물건을 납품하러 수녀원에 갔다가, 다시 한번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하는 듯한 아이를 마주한다. 

 

작품에서는 이러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싶어하는 빌의 마음을 '평범한 마음'이라고 칭한다. 나도 같은 상황은 아니더라도 빌과 같이 '차라리 몰랐다면 마음 편했을 텐데'라고 생각이 드는 경우들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침묵하고 용인하는 일을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반대의 의견을 내놓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꼭 필요한 일임에도 말이다. 특히 빌의 마을과 같이 수녀원이 지역 사회에 강한 힘을 발휘하고, 그 수녀원이 다른 종교 단체와 긴밀한 연결점을 가지고 있다면 개인이 무언가를 하기란 쉽지 않으니 더더욱이 망설여질 것이다.

 

때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체 하고, 불편한 정보를 최소화하며 나만의 삶을 살아가는 게 마음 편한 쉬운 길일지도 모른다. 그 무서운 양심 때문에. 내 앞날 살기도 팍팍한데, 내가 가진 게 많은 것도 아닌데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의 어디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걸까? 내 삶에서도 내가 보지 못하고 지나치거나 외면한 것들이 참 많을 것이다. 이런 일로 비난받을 수 있을까? 어디까지 다른 이들을 챙겨야 하는 걸까? 정말 고민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하지만 빌은 결국 자신의 엄마와 이름이 같은 아이를 수녀원에서 데리고 나온다. 바로 양심 때문이다. 앞으로의 앞날이 가시밭길일지라도, 그는 양심이 주는 가책보다 더욱 힘겨운 것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내 아일린부터 미시즈 케호까지, 가만히 엎드려 살라고 말하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그는 다른 선택을 내린다. 그의 인생의 길이 어디든 그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으니까.

 

인류의 역사는 단순히 유능하기만 한 사람들이 지금까지 발전시켜온 것이 아니다. 때로는 미련하고 바보 같아야만, 다른 사람들이 하지 말라는 위험한 일을 해내야만, 나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먼저 생각해야만, 양심에 귀기울여야만 세상은 나아진다. 비록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나온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은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지만, 막달레나 수용소를 묵인했던 정부와 수용소를 상대로 자그마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사람들이 있기에 1990년대에 늦게나마 마지막 수용소가 문을 닫을 수 있었고, 누군가가 이 책을 써서 아일랜드에 있었던 일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기에 내가 저 먼 나라에서 힘이 약한 여성들을 상대로 공공연히 저질러졌던 잔혹한 일들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이 세상의 대다수는 평범한 사람이다. 우리가 세상을 더욱 나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연대가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끼는 요즘이다.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세상 앞에 선 개인은 작고 초라하다. 세상이 나의 목소리를 경청하게 하려면 작은 목소리를 모아 큰 목소리로 만드는 방법이 필요하다. 책의 마지막은 주인공이 아이의 손을 잡고 내려가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1996년이 되어서야 폐쇄된 역사로 보아 아이를 데려온 빌에게 마을 사람들이 유대를 보여주고 모두 힘을 합칠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상상을 하긴 어려웠지만, 그때에도 분명히 침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손길을 내밀었던 사람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도 막달레나 수용소가 살아 숨 쉬며 죄 없는 여자들을 학대하고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을지 모를 일이다.

 

책의 문장들은 섬세하고도 조심스럽게 짜여 마을의 전체 분위기를 보여준다. 현실적인 안목을 빙자한 외면과 사람들의 수군거림 등은 빌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옳은 방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네드가 빌에게 보여주었던 부성도 그를 이루었을 것이다. 세라를 데리고 수녀원장을 만났을 때 수녀원장이 그의 다섯 딸을 언급했던 대화에서는 그에게 가해지는 은근한 압박을 느낄 수 있었다. 이처럼 작가는 사소하고도 담담한 묘사와 대화에 사람들의 의도와 생각을 살짝 감춰놓았다. 그랬기에 예민한 주제를 쥐고 그 누구도 다치지 않게 섬세하게 묘사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에 빌이, 미시즈 윌슨의 도움을 받고 자라지 않았더라면. 그에게 아내와 수용소에서 일하는 아이들 또래의 딸들이 없었더라면. 어머니가 수용소에 들어갈 만한 인물이라서 자신 또한 어쩌면 수용소에서 태어났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가 풍족하지 않았더라면. 평소에 다른 사람들에게 선의를 베푸는 성정이 아니었더라면. 데리고 나온 아이의 이름이 '세라'라는, 어머니와 같은 이름이 아니었더라면. 장담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벌어지는 일을 외면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모든 것들은 긴밀하게 짜여 있다. 그가 윌슨의 집에서 자라면서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더라면, 네드가 애정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자신도 모르게 지나쳤던 모든 사소한 것들이 그가 이 선택을 내릴 수 있도록 인도하지 않았더라면 빌의 선택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세상은 복잡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 또한 그렇다. 때로는 거대하고 막막한 시류에 맞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감에 젖을 때가 있다. 하지만 나의 사소한 행동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크나큰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학생 시절 해외여행을 갔던 나에게 대신 택시비를 내주며 '나중에 커서 같은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그때 대신 내주면 돼요.'라고 말했던, 이제는 이름도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누군가가 도움을 주었던 것이 내 평생 마음 한쪽에 자리하게 된 것처럼. 지금 살아가는 순간 순간을 후회스럽지 않게, 내가 나를 보기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면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