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te Light Pink Flying Butterfly 최진영 「구의 증명」 후기: 건강한 사랑을 하자고요, 제발.

최진영 「구의 증명」 후기: 건강한 사랑을 하자고요, 제발.

REVIEW/BOOK REVIEW 2025. 5. 21.

 

최진영 「구의 증명」 후기: 건강한 사랑을 하자고요, 제발.

 

드디어 이 책이 오고야 말았다. 나의 친구가 읽고 나서 불호를 엄청나게 피력했던 구의 증명. 그리고 나의 독서 모임 선정 도서 중 하나였던 구의 증명. 사실상 내가 독서 모임을 신청하게 된 큰 계기 중 하나가 이 책이기도 했다. 친구가 구의 증명을 읽고 나서 싫어하는 내용을 얼핏 듣자 하니 나도 이 책을 읽을 일이 없을 것 같아서 무슨 내용인지 대충 말해달라고 했거든. 너무 사랑한 나머지 상대방을 먹는다나? 정말 2018년 타이만 피폐 시나리오 감성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영영 이 책을 안 읽게 되리라 생각했는데, 독서 모임 도서 목록에 떡하니 이 책이 있었다. 정말? 상대방 먹는 사랑 이야기를 선정해서 넣었다고? 다들 이걸 읽는단 말이야? 심지어 강사님이 직접 선별해서 고른 책이라는 말이야? 

 

이런 감성의 책을 도대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할지. 이 식인 행위에 무언가의 숭고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서 강사님이 책을 고른 건 아닐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될 미래가 두렵기만 했다.

 

하지만 크나큰 두려움을 안고 독서 모임에 나가니 막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감상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은 아직 살만하구나. 그렇다면 대체 누가 이 책을 읽고 그렇게 많이 소비를 하고 있단 말인가? 강사님 말로는 「구의 증명」이 나왔을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최근 2~3년간 2030 세대들이 많이 읽는 책이 되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느 누가 이러한 내용을 출판한들, 그것까지는 상관없다. 내가 충격받은 지점은 '대체 왜 이 책이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아졌는가'니까.

 

책을 읽기 전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비록 내용을 보기 전 친구에게 소재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너무 편협한 마음을 가지지 말자. 이미 박힌 고정관념에 매몰되지 않고 이 책이 어떤 진정한 의미를 품고 있는지 헤아려보자. 단순히 식인을 넘어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깊은 메시지...우웨엑.

 

축하드립니다. 지금까지 읽은 2025년 도서 중 제일 별로였던 책으로 선정되셨습니다. 「청춘의 문장들」이 쓰인 시기는 지금보다도 여성 인권이 낮았을 시기였고 개정판에서 여성 혐오적인 내용이 빠져서 어느 정도 참작이 되기라도 했지 2015년에 나온 이 책에게는 변호할 여지가 없다. 네. 앞으로 펼쳐질 내용은 지독한 불호 후기니 마음에 드셨던 분들은 뒤로 가기를 추천드립니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구의 증명이라길래 당연히 구球를 생각했던지라 제목만큼은 제법 흥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 또한 아니었다. 여기에서 구는 구球가 아닌 주인공 '담'의 연인의 이름이었다. 그런 구를 먹음으로써 그의 존재를 증명? 하고자 하는? 정신 아픈 사랑이다.

 

 

첫 시작의 문장들은 좋았다.

 

터무니없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 믿음은 아주 유용하다. 말도 안 돼,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일에야 믿음이란 단어를 갖다 붙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일단 믿으라. 그러면 말이 된다.

 

 그때만 하더라도 깊은 공감을 하면서 읽었는데······. 이런 내용이 베스트셀러고 많은 사람들이 읽으면서 공감하고 있다는 게(내가 주워들은 구의 증명 후기는 죄다 불호였기에 의문이긴 하지만 그래도 개정판이 3n쇄까지 갔으면 무언가의 공감을 사고 있다는 뜻 아니겠나?) 정말 믿기지가 않고 말도 안 된다. 

 

 

도대체 왜 사람을 먹음으로써 사람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는 걸까요? 내가 그렇게 오래 산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오래 살게 되는 걸까요? 그 사람을 기억하고 싶으면 다른 방법도 충분하지 않나요? 왜 이런 비윤리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일까요? 물론 어떠한 사람이 소중할 수 있다. 하지만 도는 넘으면 안 되지 않나? 내가 이상한 거야? 사랑의 은유일 수 있지. 하지만 세상에는 다른 은유 방식이 차고 넘치지 않나? 왜 이런 식으로? 똥을 그리고 '이건 황금을 비유했어요' 한다고 똥이 황금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이들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이건 의존이자 병이고 서로밖에 모르는 고립이다. 사람을 낙원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그런 말을 늘 품에 안고 살아가는 나는 좋아하는 것을 여러 개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지낸다. 물론 나 또한 특별히 소중한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소중한 사람이 세상에 단 한 명이라고 생각해 보라. 그 사람이 무너지는 순간 자신 또한 무너지는 것이다.

 

만약 소중한 사람을 잃은 슬픔에 허우적거리다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는다면, 그건 괜찮다. 하지만 담은 아니었다. 정말 기이한 관계다. 어찌 보면 편협한 관계의 설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릴 적부터 소꿉친구라는 설정. 하지만 그를 넘어서 담과 구는 서로를 제외하고는 전혀, 다른 사람과 교류하려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 사이의 절절한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절절해야만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두 사람이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다른 사람과도 교류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 다른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 물론 중간에 노마라는 아이가 있었고 구가 잠시 동거하기도 했던 여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또한 어떤 방식으로든 곁을 떠나갔고, 구와 담은 더 이상의 새로운 시도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둘뿐이다. 세상에 즐길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오로지 한 사람만 맹목적으로 바라보기엔 세상은 너무 다채로운데. 그런 소중한 것들을 마냥 흘려보낸다. 

 

물론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가 있을 수 있다. 그 자체를 가지고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 끝을 보면 과연 이게 숭고한 사랑일지 의심스럽다.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끝없이 하강하기만 하는 이런 병적인 사랑을 과연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랑이란 정말 마법 같은 단어다. 이 단어 하나로 온갖 불합리한 상황을 견디는 일이 이 세상에도 너무 많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이 과연 '진실됨'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상대방에게 행하는 폭력이 아니라? 제발 정신 차리고 이후의 일을 생각해 봐. 식인을 해서 어떡할 거냐고. 그 이후로 제대로 살아갈 수나 있냐고. 들키면 어떡할 건데. 사랑하고 애도하는 방식이 '먹는 것'밖에 없는 거야?

 

가뜩이나 구는 매력까지 없다. 대체 담에게 해주는 게 없다. 초등학생 때 괴롭혀, 애매한 관계 속에서 다른 여자랑 같이 살면서 즐길 건 다 즐겨, 그렇다고 해서 끼가 철철 넘치는 것도 아니고 애정 표현은 담이 더 한다. 그는 담의 이모가 죽을 때도 곁에 있어주지 않았다. 뭐 하나 해준 게 없다. 그의 부모가 남긴 빚은 구의 잘못이 아닌 불가항력적인 상황이지만 그 또한 담에게는 해로운 상황이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담은 구를 사랑한다. 대체 왜? 관계성에 기반한 소설이라면 그들의 감정에 어느 정도 공감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이 구질구질하기만 한 관계를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솔직히 말해서 어디서 많이 본, 기시감이 가득한 인터넷 소설을 정제된 문장으로 정리해 둔 글 같았다. 가뜩이나 구의 캐릭터 설정값이 내가 몇 년 전에 사용한 <부모가 빚을 남기고 사라지는 바람에 사채업자에게 쫓겨 밤낮없이 돈을 벌고 도피성 입대를 하는 어쩌구>의 설정과 너무나도 비슷했기 때문에 더욱 기시감을 느껴버린 것이다. 그만큼 어디선가 볼 법한 소재라.

 

대체 사람들이 어떤 점에서 이 책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구와 담의 러브 스토리? 모르겠다. 로맨스물을 이미 너무나도 많이 보았는지 특별할 것 없어 보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만난 둘. 담이 마음에 들어서 제대로 말도 못 붙이면서 담을 괴롭히기만 했던 구. 그렇지만 서로 사랑하게 됨.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런 첫 만남까지도 너무 진부하게 느껴졌다. 마치 '남자애가 괴롭히는 건 너한테 관심 있어서 그런 거야'라고 말하는 구시대적 발상으로 남성이 여성을 괴롭히는 행위를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행위로 용인하는 것만 같았다. 중간에 나오는 사춘기 시절의 구가 담의 가슴을 보고 어쩌고 저쩌고도 정말 관심이 없었다.

 

또한 그들의 설정값이 너무 극적이다. 부모도 모르고 할아버지 밑에서 자란 담. 생면부지의 이모가 비구니 생활까지 그만두며 키우고, 구는 부모로 인해 사채업자에게 거액의 빚을 지고. 밤낮으로 일하고. 그 와중에 두 사람의 눈앞에서 노마가 교통사고로 죽고. 누나랑 바람 아닌 바람을 피우고. 호스트바에서 몸을 팔고. 그러나 스토리가 극적이고 재미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딱 하나 마음에 들었던 점이 있다면 이야기의 서술방식, 그뿐.

 

처음 읽었을 때만 하더라도 도저히 이러한 내용을 남녀 간의 이성애적 사랑으로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열린 마음을 가지고 '좋아, 두 사람이 남녀가 아니라 여여라고 생각하고 보자. 그렇다면 읽을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구와 담이 손을 잡았다고 깔깔거리는 아이들의 반응이나 성기를 씹어먹는 담의 행동에서 더 이상 여여로 볼 수 없었다. 그래. 남녀 간에도 오로지 우리가 생각하는 이성애적인 사랑만 있는 건 아니지. 그보다는 사람 간의 인간애일 수도 있어. 그런 희망을 품으며 중후반까지 봤다. 책의 문장 하나하나가 '얘네는 에로스적 사랑을 하고 있어요'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이 책의 논의가 절대 사랑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가뜩이나 데이트폭력 따위의 '사랑'을 빙자한 온갖 미친 짓거리가 난무하는 혼란한 시대에 '식인은 아름다워'라는 인상을 심어줄까 봐 나는 너무 두렵다. 오히려 이런 쪽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책에도 나오긴 했지만 분명 어떤 문화에서는 식인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치 과거에는 근친혼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지금 들어서는 문제가 되었듯, '식인'이든 '근친혼'이든 문화나 역사에 따라 받아들여지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개념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라는 논의를 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토론에 참여할 수 있다. 

 

또는 구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분명 우리나라의 상속제도에 따르면 부모가 진 빚은 자녀가 상속을 포기할 수 있다. 하지만 구와 같이 법망에 존재하지 않는 사채업자에게까지 손을 뻗었다면 법률적 구조를 받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그럴 때는 대학도 제대로 못 간 어린애들끼리 해결하려고 아등바등할 게 아니라 무언가의 사회적 안전망이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 우리에게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단순히 개인으로서는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다. 비록 남에게 손을 뻗고 싶지 않더라도 손을 뻗어야 하는 게 세상이다. 내 옆의 소중한 존재만 바라보다가 그가 무너지면 나도 따라 무너질 수 있는 법이다. 그럴 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고서라도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책은 언젠가 이 세상에 살아갔던 구를 증명하고자 담이 자신의 삶의 의지를 다짐하는 내용이지만, 그 동기가 틀려먹었다. 제발 너의 삶을 살도록 해. '지나고 보면 별 일 아닐 수 있다'가 상대방의 입장과 감정을 헤아리지 못한 얄팍한 꼰대 발언일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견고한 두 사람만의 세계에만 갇힌 담에게는 밖으로 나올 수 있을 만한 외부의 도움과 손길이 필요해 보인다.

 

결국 책을 끝까지 다 읽고 '사실 병적인 사랑을 비판하는 내용은 아닐까' 하는 일말의 기대심도 가져 보았다. 하지만 작가 후기에서 철저하게 무너졌다. 애인을 먹어보고 싶었다니. 할 말이 없어졌다.

 

내가 이런 거 너무 많이 봐서 이런 거야? 

믿기지가 않는다. 말도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