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te Light Pink Flying Butterfly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내가 알고 있던 드라큘라는 어디에?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내가 알고 있던 드라큘라는 어디에?

REVIEW/BOOK REVIEW 2024. 9. 30.

 

 

8월의 선정 책은 드라큘라였다. 그런데 왜 8월 선정 책의 후기를 지금 쓰느냐? 그건 바로 친구와 나 둘 다 8월 안에 책을 다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빌리기 전만 하더라도 엄청 길지 않은 소설일 거라 생각했는데 정작 도서관에 빌리러 갔을 때 거대한 책이 있었고, 결국 도서관에서 빌렸던 일러스트판 드라큘라는 제대로 읽지도 않고 반납, 이후에 윌라 오디오북에 들어와 있는 드라큘라를 e북으로 읽었다. 간단하게 책의 출판사 평을 해보자면··· 스타북스에서 나온 드라큘라는 웬만해서는 읽지 말자. ""가 생략된 경우도 있고 띄어쓰기에 오탈자에 난리가 났다. 하지만 그 거대한 책을 실물로 읽기는 너무 부담스러웠으므로 나는 이 책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크게 관심 없던 흡혈귀라는 소재를 TRPG를 통해 좋아하게 되고, 이어서 브로드웨이판 드라큘라 뮤지컬을 보며 원작 책에 대한 흥미가 생겨버린 나. 원래 뮤지컬의 내용이 어땠을까에 대한 궁금증과 더불어 내가 플레이하고 있는 VtM에도 드라큘라가 나오는 설정이므로(드라큘라가 브램 스토커에게 해준 이야기를 브램 스토커가 엮어서 책으로 냈다는 설정이다) 이번에 책을 읽고 내가 향유하는 뱀파이어 소재의 TRPG에 대한 좋은 레퍼런스로 삼아야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그리고 뮤지컬 특성상 노래가 많이 삽입되어 줄거리를 세세하게 집어넣질 못하니, 드라큘라가 대체 무슨 사연을 가지고 있었을까 상당히 궁금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뮤지컬 드라큘라는 정말 정말 많은 부분이 각색이 되었고, 내가 알고 있던 드라큘라 같은 남자는 소설에 나오지 않았다.

 

 

얘네가 내가 아는 드라큘라.

잘생겼음. 사랑에 미쳤음. 목소리가 좋음. 왜 얘랑 결혼하지 않나 싶음. 드라큘라도 사정이 있었을 거임. 내 머릿속에 있던 고전적인 드라큘라의 이미지는 편견이었음.

 

하지만 내가 읽은 드라큘라.

썩은 냄새남. 거미처럼 벽을 거꾸로 타고 내려감. 여자들을 종으로 부리고 싶어 함. 상자에서 자다가 끔살 당함. 뮤지컬은 그냥 드라큘라 미화였음. 고전적인 드라큘라 이미지가 찐이었음.

 

 

 

물론 각색이 안 됐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내용의 흐름이 달라도 너무 달라서 혼란스러웠달까. 결정적으로 원작 소설은 반 헬싱이 주인공이나 다름없지만 뮤지컬에서의 반 헬싱은 조연으로 밀려나고 드라큘라가 주인공이 되며 그에게 온갖 아름다운 서사들이 생겨버렸다. 반 헬싱이 이걸 알게 됐다면 뒷목 잡고 쓰러졌을 게 분명하다. 아니, 아마 브램 스토커도 그랬을 듯? 신의 이름으로 무찌른 탐욕스러운 괴물이 현대에 들어 낭만적이고 섹시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드라큘라를 읽다보면 왜 브램 스토커가 이후의 흡혈귀 장르의 시초를 다져두었다고 말하는지 아주 잘 알 수 있다. VtM에 나오는 흡혈귀 설정들도 드라큘라에 정말 많이 나온다. 피를 마시는 건 말 그대로 흡혈귀니까 그건 기본이고, 음식 섭취에 역함을 느낀다거나 자의로 물을 건너지 못한다거나, 평범한 인간에게 최면을 걸고 명령을 한다거나, '혈족'이라는 표현을 쓴다거나. 그중에서 가장 놀랐던 부분은 역시 처음 조나단이 드라큘라의 성에서 묵다가 세 여자를 만났을 때 그들이 흡혈하려던 행위를 '키스'라고 표현하던 부분이었다. 대체 왜 VtM에서 흡혈을 키스라고 표현하는지 알지 못하고 정말 변태 같다고만 생각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VtM에서 '생명혈'이라는 표현도 랜필드가 피와 생명을 논하는 장면을 보면 왜 그렇게 표현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외에도 자발적으로 흐르는 물을 건너지 못한다거나, 해가 뜨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잠들어버린다거나, 마늘과 성물을 싫어한다거나 하는 온갖 요소들이 죄다 드라큘라에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제목이 드라큘라인 만큼 드라큘라가 많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그 길고 긴 분량의 소설에서 드라큘라가 등장한 부분은 생각 외로 많지 않았다. 처음 조나단 하커가 드라큘라의 집에 찾아가 그와 대화를 나눌 때, 그리고 사람들에게 조금씩 목격된 순간. 미나를 홀려 미나에게 피를 먹이던 순간 말고는 드라큘라가 많이 나오지 않아 아쉬웠다. 결국 VtM 플레이에 레퍼런스가 되어주었다기보다는 이미 VtM에 레퍼런스가 되어준 기원을 확인한 데에 그쳤다고 해야 할까.

 

오히려 드라큘라를 읽으며 새로 알게 된 내용들은 뱀파이어라는 창작물에 대한 것이 아닌, 당시 사람들이 살아왔던 고리타분한 런던의 사회상이었다. 소설의 사건이 진행되는 내내 어찌나 남성 중심주의적인 사상이 자연스럽게 깔려 있던지. 그냥 이 인간들의 삶은 여자가 나약하고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잘못된 선입견이 제대로 깔려 있었다. 가령 젊은 부인이 기억력이 좋은 경우는 흔치 않다고 말한다거나, 미나를 칭찬하면서 그녀는 남자의 두뇌와 여자의 마음을 갖추었다거나 등등등 미나에게 칭찬하면서도 '그래봤자 우리보다 열등하고 지켜줘야 한다' 따위의 사상이 묻어나서 정말 구렸다. 물론 그 당시 사회에 쓰였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현대에 이 책을 읽는 우리가 어느 정도 감안해야 하긴 하겠지만, 실제 빅토리아 시대를 살아갔던 여자들은 이러한 차별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살았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미나도 판단력이 뛰어나고 남자들과 함께 문제의 해결에 나서고 싶어 하는데 제지당하지 않나. 돌아오는 칭찬이라고 해봐야 '우리 남자들 정도는 하다니 대단하군' 뿐이고. 그런 세상에 살면 아무리 자기가 뛰어나다 한들 남자들이 만들어놓은 한계에 자신을 가두고 말지 않을까. 하지만 미나라는 캐릭터 자체는 뮤지컬보다도 소설에 더 주도적인 여성으로 그려졌다는 게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때문에 뮤지컬과 달리 소설에서는 루시보다는 미나가 더 마음에 들었다. 

 

가장 슬픈 사실은 그렇게 여성 인권이 후졌던 빅토리아 시대와 비교해서 지금의 여성 인권이 과연 얼마나 나아졌는가 하는 부분이다. 적어도 드라큘라 속 남자들은 목숨 걸고 미나를 지키려고 하지 않았냐. 당장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으로부터 며칠 전 남자가 일면식도 없는 여학생을 찌르는 범죄가 발생했다는 신문을 읽으니, 비극적이게도 명예를 중시하느라 자신들의 소유물 그 이상의 위치에 존재하지 않는 여성을 위해 목숨 바쳐 위험한 일을 무릅쓰는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남자들을 21세기 남자들보다 좋게 봐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결국 드라큘라에서 내가 바랐던 미나와 드라큘라의 연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고, 루시를 잃고 나서 미나를 지키기 위한 남자들의 협동과 의지, 그리고 남자들과 종교에서 완벽하게 생각하는 여성상(사실 종교의 정절 등도 남자들이 만들어낸 셈이니 결국 같은 주체라고 볼 수 있겠다)인 미나의 남편에 대한 사랑 등등을 실컷 보고 왔다. 이런 남성 중심적인 내용이지만, 마지막에 드라큘라를 무찌르는 장면에서 미나를 지키기 위해, 사랑했던 여자의 복수를 위해, 악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희생을 무릅쓰고 전투를 벌이던 퀸시 모리스가 결국 죽기 전 "제 목숨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라고 외치는 장면, 그리고 이후에 모두가 행복해지고 미나와 조나단이 아이의 이름을 퀸시라고 붙이는 결말은 마음에 들기는 했다. 아무래도 드라큘라를 접하는 자세를 잘못 설정하고 책을 읽은 것 같다. VtM이 아니라 CoC 탐사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읽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소설이 진행되는 형식은 당시 소설 치고는 꽤 참신하게 느껴졌다. 내가 워낙 책을 많이 안 읽어서 견문이 얕아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드라큘라의 내용은 온전히 주인공들이 주고 받는 서신과 일기, 그리고 때때로 신문 기사로만 이루어진다.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이 상세하게 드러나지만, 이러한 점들이 오히려 사건의 진행을 더디게 만들기도 했다. 처음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 부코비나의 풍경과 사람들의 풍습부터 시작해 온갖 내용들을 일기에 구구절절 써놓는 조나단에게서 상당한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요점을 간단하게 기록하지 못하고 내용이 장황하다. 바로 내 일기가 그랬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결국 내 글에 스스로 지쳐 떨어져 나가지만 조나단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록을 이어나갔다는 점이다. 이렇게 세밀한 묘사와(등장인물들의 외모 설명이 정말 상세한 편이었다) 감정 표현, 풍경 묘사 등이 상세하게 들어가다 보니 마치 내가 등장인물들과 함께 하는 것 같은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문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러한 형식을 취하다 보니 분량이 상당히 많아져서 결국 뒷부분에서는 설렁설렁 넘기며 읽게 된 부분도 많았다. 

 

결국 이 소설을 통해 나는 단순한 판타지 소재에 대한 레퍼런스보다도 당대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갔는지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명예를 중시하는 남성과 사회적으로 억압된 여성, 정신의학의 발전, 인종차별적인 표현과 작위가 있으면 사회적으로 프리패스가 된다는 것 등등. 또한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맹목적으로 종교를 믿고 살았는지에 대한 것도, 무신론자로서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는 너무나도 신기하기만 했다. 이래도 신의 뜻, 저래도 신의 뜻. 아무튼 신의 뜻으로 모든 것을 납득할 수 있다는 게.

 

그리고 이야기가 빠질 수 없는 수혈. 당시 브램 스토커가 드라큘라를 썼을 때에는 혈액형 분류가 존재하지 않았고, 때문에 당나귀 피를 수혈하거나 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소설 속에서는 남자들이 루시를 살리기 위해 돌아가면서 자신의 피를 수혈해 준다. 피가 응고되는 일은 없다. 정신을 잃었다 하면 무조건 브랜디를 먹이고, 미나에게 최면을 걸어 많은 정보를 얻어낸다. 당시의 의학 발전의 수준이 보이는 대목들이라서 제법 흥미로웠다. 결국 브램 스토커의 상상력이 더해진 판타지······.

 

책을 다 읽고 나서 다른 사람이 남긴 서평도 봤는데, 내용의 핵심은 바로 드라큘라라는 존재가 빅토리아 시대에 금기시되었던 성적 욕망을 대변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정절을 지키고 남편만 바라보는 미나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지키고자 하는 성녀와도 같고, 드라큘라의 행동은 흡혈이 '키스'로 표현되고 그와 그의 수하의 외모 또한 관능적이며 어두운 밤에만 다닌다. 결국 신의 뜻을 대변하는 사람들은 숭고하게 맞서고 숭고하게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에 대비되는 악한 존재인 드라큘라는 제대로 힘조차 써보지 못하고 상자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거의 130년 전에 쓰인 이 소설은 당시의 사회상을 비추어 보았을 때 어찌 보면 진부하기도, 어찌 보면 획기적이기도 한 소설이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의 소설이 이후에 등장하는 뱀파이어 문학의 시초가 된 것을 보면, 그만큼 브램 스토커가 뱀파이어라는 존재를 글만으로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만큼 상세하게 묘사하고 그 특성을 기록해 두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역시 내 마음속 드라큘라는 그냥 뮤지컬과 VtM에 등장하는 드라큘라로 해야겠다. 브램 스토커 씨. 당신은 이용당하셨습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