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te Light Pink Flying Butterfly 「수확자」, 영원 속에서의 인간이라는 존재

「수확자」, 영원 속에서의 인간이라는 존재

REVIEW/BOOK REVIEW 2024. 7. 15.

 

「수확자」, 영원 속에서의 인간이라는 존재

 

질병과 죽음을 정복한 세계. 유능하고 인간친화적인 인공지능이 정치와 행정을 대신하는 세계. 그 세계 속에서 인공지능 선더헤드의 간섭을 유일하게 벗어나, 인구 조절을 위하여 인간을 선택해 죽음을 부여하는 수확자들의 이야기.

 

SF소설인 「수확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다름 아닌 친구의 후기 중 '사랑'에 대한 언급 때문이었다. 나는 사랑이 좋다! 나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사랑이 수확자 시리즈에 있다고?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대체로 재미있게 읽는 책 같아 보였다. 표지에 얼굴이 나오지 않는 것도 제법 마음에 들었다(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마음속 위시리스트로 품고 있었지만 시리즈인 만큼 읽어야 할 분량이 많아 미루고 있다가 이번 7월의 책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7월 10일에 다 읽어버렸으니 정말 빨리 읽은 책이었다. 분량은 생각 외로 키르케랑 비슷했는데 6월 한 달을 지지부진 붙잡고 있었던 때와 비교하면 수확자를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내용을 접하기 전에는 단순히 SF 소설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앞부분의 설정을 읽어보니 SF중에서도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었다. 예전에 다른 디스토피아 소설도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로이스 로리의 「기억전달자」를 추천한다), 책의 내용은 초반부터 나의 흥미를 쉽게 끌었다. SF 창작물 속 인간이 죽음을 뛰어넘은 설정은 수확자 말고도 많이 있다. 소설 수확자가 다루는 사망 후 시대에서는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이 인구 밀도의 조절을 위해 분기마다 할당량을 정하고 죽음을 초월한 인간들의 목숨을 수확한다. 사망 후 시대는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이들을 사신이라고 칭하기보다는 마치 추수하는 농부와 같이 '수확자'라고 부르고 목숨을 앗아가는 행위를 '수확'이라고 불렀다. 한 해 동안 키운 작물들이 가을 수확을 통해 결실을 맺는 것처럼, 목숨을 앗아가는 행위 또한 인생의 완결이라는 마침표, 죽음으로서 인간은 결실을 맺게 된다는 관점이 꽤 인상 깊게 남은 것 같다.

 

나는 죽음이라는 개념이 너무 싫어서 평생을 죽지 않고 살고 싶고, 이러한 내 생각을 반영하듯 창작 캐릭터에게도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고 싶어하는 편이다. 하지만 작가의 관점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죽음, 즉 유한한 생명은 삶이 끝나기 전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한다는 열정과 이어졌고 사망 후 시대의 무한함을 달성한 이들은 모두가 침체에 빠진 듯 보였다. 수확자 마리 퀴리는 얼굴에 침체가 보이는 이들을 수확한다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엔 책 속에 드러나는 사회 자체가 어느 정도 침체가 되어 있었다. 죽음은 싫고 삶은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살아 숨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의미 없는 직업을 가지고 의미 없는 일을 하며, 두 사람 간에 싹트는 사랑 또한 인간의 삶보다 빨리 끝을 맺었다. 희로애락을 담은 예술작품은 사망 후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고, 아이러니하게도 일부 사람들이 열광하는 건 목숨을 부여하는 자, 수확자를 만나거나 그들의 수확 현장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죽음을 초월한 이들이 타인의 죽음에 열광한다. 영원으로 향한 인류의 발전과는 모순되는 욕망이다.

 

결국 인생이란 자신의 삶에서 얼마나 값진 의미를 찾아내는가의 문제인 것 같다. 물질적인 면도 물론 중요하고 편안한 삶을 영위하기 어려우면 의의를 찾아낼 여유조차 얻지 못하겠지만, 반대로 기계처럼 아무 의미도 없이 그저 '생존을 위한 기능'만을 하며 살아가는 삶은 과연 만족스러울까? 지금 우리와 같은 삶이든 죽음이라는 공포를 떠나보낸 순간이든 이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을 사람으로서 살아가게 한다. 아주 가끔 내가 의문을 갖는 무슨 이유로 이 삶을 살아가는 걸까? 따위의 다른 생명은 고민하지 않을, 생산적이지도 않고 머리만 아프기만 할 철학적 문제들이 역설적이게도 나를 사유하는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한다. 어쩌면 로언과 시트라가 처음에는 목숨을 거두는 수확자의 사명을 거부하다가도 패러데이의 교육 하에 받아들이게 된 이유도, 하루하루 생명을 거두며 보통 사람들이라면 전혀 생각하지 않을 치밀한 고민과 도덕적 판단들이 수확자의 비인간적인 사명과는 달리 인간다운 사유를 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수확자를 제외한 그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수확령

 

내가 책을 후루룩 읽어내린 걸 보면 확실히 재미있게 읽기는 했다. 흥미가 없으면 나는 책의 진도가 죽도록 안 나가기에, 얼마나 매끄럽고 빠르게 읽히냐가 흥미의 척도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도 이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창작물은 창작물로서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세계관에 구축된 정치 체계가 신경이 안 쓰이려야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조금의 오류 없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인공지능 선더헤드. 그러나 선더헤드조차도 어떤 사람이 죽어야 할지 결정할 수는 없었다. 이 역할을 맡은 이들이 선더헤드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수확령의 구속을 받는 존재들, 바로 수확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이렇게 해야 정당하다'라고 일컬어지는 수많은 관습과 문화가 있지만, 결국 그들의 목을 조르는 건 오로지 열 개의 규율일 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과연 목을 조르기나 했을까 싶다. 본디 최상위법이란 세세하지 않고 포괄적인 내용을 다루지만 이 '수확령'은 최초의 현명한 수확자들이 만든 이후 단 한 번도 손댄 적 없었고, 하위의 법률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정말 독재 기관이 따로 없다. 그 누구도 수확자 무리에 간섭할 수 없고 오로지 수확자들끼리만 내부 규율(심지어 성문법의 형식도 아니다)을 규정하는 독보적인 집단이 몇 백 년, 그리고 앞으로 몇 천 년 흐를 동안 멀쩡할 것이라 생각했단 말인가? 아무도 손댈 수 없는 너무도 강력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수확자 스스로만이 자정작용을 할 수 있었다. 과연 자저이 제대로 이루어질까? 오죽하면 나는 작가가 독재 정권에 살아본 적이 없어서 이런 부분을 고려하지 않은 걸까라는 생각도 했다.

물론 소설 속 내용은 이러한 수확자들의 구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는 한다. 그렇지만 나는 완벽한 인공지능을 만들어낸 현명한 사람들이 왜 이런 부분을 간과했는지, 기본적인 설정부터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물론 선더헤드라는 AI에게 인간의 생존과 사망을 결정짓게 하는 데에는 수많은 윤리적인 문제가 따를 수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인간은 또 얼마나 고결하고 합리적인 존재라서 타인의 생사여탈권을 미약한 제재 몇 가지를 제외하곤 자유롭게 부여한단 말인가? 물론 나 또한 인간인 이상 수확의 권한을 온전히 AI에게 맡기는 쪽은 께름찍하게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수의 인간이 다수 인간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놔두는 체계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폐해는 도덕적 기준을 이탈한 수확자 고더드와 그 무리가 수확자들 내에서 득세하고 수확자 무리의 근간이 흔들리는 결과를 낳았다. 책에서 명백한 악역으로 나오는 고더드만 잘못된 게 아니다. 아마 예전부터 폐해는 축적되고 있었을 것이다. 고더드를 자신의 제자로 임명시킨 고위 수확자 크세노크라세스가 바로 그 훌륭한 예시다. 한때는 크세노크라세스 또한 훌륭한 도덕적 기준을 가진 수확자 중 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가장 구식의 방식으로, 그저 나이가 가장 많아서 고위 수확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사람 때문에 콘클라베가 아주 우습게 돌아간다. 많은 수확자들이 비교적 중요치 않은 내용을 다루며 옥신각신해도, 결국 중요한 의제는 이 사람의 의견 하나면 순식간에 종결되어 버린다. 올림포스의 신들과 다를 게 없다. 아무리 다른 신들이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한다 해도 신들의 왕인 제우스가 마음 내키는 대로 휘두르면 다 끝인 그리스 신화와 다를 게 무엇인가?

 

결국 이러한 폐단으로 인해 수확자 패러웨이가 전례없이 두 연습생을 들였던 선택은, 한쪽이 수확자로서 선택받으면 다른 한쪽을 죽여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조항을 만들어냈다. 수확자가 특정 상품을 광고해도 되는지 따위의, 생명과는 직결되지 않은 의제는 오랫동안 다루면서 사람의 목숨이 걸린 문제는 콘클라베를 빨리 끝내야 한다는 이유로 고위 수확자 독단으로 결정해 버린다? 그 아래 수확자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쉽게 묵살되어 버리는 체계는 왕정과도 같다. 크세노크라테스 또한 수확령을 어기고 얻은 딸이 고더드의 볼모로 잡혀 고더드의 명령을 따라야 했기에 그러한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정당한 근거를 가졌다고 볼 수도 없다. 사람의 목숨을 수확하는 일이 너무나도 중요해서 행정부와 수확령을 분리시켰으면서 그렇게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다니, 하물며 크세노크라테스가 고더드의 노예로 전락해 그러한 결정을 내렸다고 하더라도 다른 수확자들이 충분히 논의할 수 있는 시간조차 갖지 못한다는 게 우스운 일이다.

 

이 말도 안 되는 흐름은 수확자 패러데이가 두 연습생을 죽음에서 구해내기 위해 사망으로 위장하고 난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원칙적으로는 스승이 자신을 수확했을 때 연습생은 연습생의 신분을 잃는다면서, 고더드가 두 사람을 데려가 장난질을 하지 못하게 수확자 퀴리가 시트라를 데려간 이후에도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수확자가 되었을 때 다른 한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조항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처음 수확령을 만들고 행정부와 분리시켰다는 최초의 '선지자'들이 지닌 판단력에 의심이 갈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다 지나간 역사를 필수로 배워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점에 있다. 어떻게 사람의 판단력을 믿고 열 개의 조항만을 만들어 두었는지, 수확령과 행정부의 분리는 필요하다 치더라도 왜 일반 시민들조차 수확자들에게 조금의 권리도 행사하지 못하는지. 인간의 판단력은 무한하지 않다. 아마 크세노크라테스도 고더드를 자신의 연습생으로 들일 때, 그가 최후에는 악덕을 저지르는 수확자로 성장하리라고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변수가 있고 소수의 사람들은 이를 통제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아무리 비효율적이라도 현재의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향하고자 하지 않은가.

 

결국 치닫는 부패 속에서 로언 데이미시는 자신의 스승이 된 고더드의 가르침을 받다가, 끝내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고더드와 그의 무리를 재생할 수 없을 정도로 태워 죽이기에 이른다. 책의 마지막을 보면 (당연히도) 수확자가 되지 못하고 시트라의 도움을 통해 콘클라베에서 도망친 이 소년은, 검은 로브를 쓰고 수확자를 단죄하러 다니는 '수확자 루시퍼'가 되어 부패해 버린 수확자들을 처단하고 다니는 것 같다. 그가 고더드를 끝내 죽이는 장면에서 악이 단죄되는 쾌감을 많은 이들이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나 역시 그렇지만, 결국 이 또한 한 개인이 자신의 도덕적 가치를 세우고 주관적인 정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를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을까? 패러데이의 선택을 받은 로언만큼은 계속 정의를 따를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람을 품고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사회 체계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해 한 개인이 희생자로 몰리고 끝내 혼자의 힘으로 자정작용을 해야 한다는 상황이 끔찍하기도 했다. 오히려 로언과 시트라는 다행스러운 상황일지도 모른다. 고더드와 그 무리들의 손에서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그리고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갔는지.

 

법은 결국 도구일 뿐이다. 법이 인간보다 우선일 수는 없다. 따라서 인간에게 해악을 주는 법률은 고쳐야 마땅하다. 수확령을 뜯어고칠 수 있는 절차적 수단이 없으면 그 수단을 만들어서라도 해야 하며, 수단을 핑계로 가만히 있는 태도는 방임일 뿐이다. 

 

이렇게 구구절절 쓰고 나서 수확자를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하기가 좀 웃기기도 하지만 그만큼 몰입했으니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게된 것 아닐까? 어쨌든간 기술과학의 발전에도 제대로 정신 차리지 못한 수확령의 어둠은 그곳에서 빛나는 진주들을 더 돋보이게 해주기도 한다(이런 대비를 위해 수확령의 꼬락서니를 그런 수준으로 설정한 건가 싶기도 하지만). 사랑조차 영원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세계 속에서 패러데이와 퀴리, 그리고 시트라와 로언은 서로를 깊이 신뢰하는 남다른 관계로 이어져 있다. 앞부분부터 로언과 시트라가 서로에게 끌리는 장면들이 보면서 틈만 나면 무작정 키스부터 하는 할리우드 영화 같은 전개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물론 중간에 키스하는 짤막한 장면이 나오긴 하지만 이 정도의 담백함이라면 OK.

 

각자의 스승을 따라 갈라지고 난 이후에도 로언과 시트라는 서로를 생각했다. 로언은 시트라가 수확자가 될 수 있게 만들어주려고 반칙을 감행하며 시트라의 비난을 사기 위해 노력했고, 시트라는 로언이 변했으리라 말하는 퀴리의 말에도 계속 그를 믿었다. 그리고 마지막 콘클라베, 시트라가 수확자가 되고 난 이후 로언을 수확해야 하는 처지에 놓일 때 시트라는 기지를 발휘해 로언에게 면제권을 부여하고 로언이 탈출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다른 부연 설명도 없는 짧은 글자, 사랑해. 나도야. 라는 각자의 단 한 마디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패러데이의 밑에서 몇 개월만을 함께 보내고, 그 이후로는 제대로 만나지도 못했던 관계인데 왜 그 짧은 말 한마디에 많은 감정들이 느껴지는 것일까? 이 '사랑'이 단순한 연애적 감정을 뛰어넘어 서로에 대한 믿음, 그들만이 느낄 수 있는 유대감, 함께 이어져 있는 이상 따위를 아우르는 총체적인 감정이기를 바란다.

 

수확자 속 잘 떠오르지 않던 인물들의 얼굴이 구체화되던 순간이 있었다. 나는 보통 인물들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많이 읽는 편인데, 수확자는 의외로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주인공들의 얼굴을 떠올릴 생각을 안 했다. 책을 읽다가 문득 그들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게 되어을 때는 바로 로언이 음파교단의 교회에서 고더드의 무리를 죽이고 불을 지르던 때였다. 볼품없는 양상추였던 그가 자신의 신념을 공고히 세운 또 다른 사람으로 재탄생한 것처럼 나의 머릿속에서도 그저 이름만 둥둥 떠다니던 이들이 살아 숨 쉬는 인물들이 된 것 같았다. 그 순간이 무척이나 기억에 남는다. 

 

 

 

+추가

 

후기에 써야지! 해놓고 안 쓴 부분이 있었다.

 

인구 관리를 위해 사람을 수확한다면서 정작 자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죽이지 못한다는 게 너무나도 모순적이었다. 인구 조절을 할 거면 죽고 싶어하는 사람부터 거두는 게 맞지 않나? 물론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할지라도. 왜 그런 사람들은 놔두고, 이미 영생으로 자연의 섭리는 파괴되어버린 세상에서 죽고 싶지 않아하는 사람을 거둬가는지 알 수가 없다.

 

이제 그만 써야지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