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동유럽 여행] #8. 독일 베를린: 체크포인트 찰리,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재즈 바 비 플랫 b-flat
TRIP/2023 독일 체코 헝가리 오스트리아 2023. 10. 25.
[독일 동유럽 여행]
#8. 독일 베를린: 체크포인트 찰리,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재즈 바 비 플랫 b-flat
2023. 9. 24. (일)
이후 버스를 타고 체크포인트 찰리로 향했다. 독일에서는 구글맵 도착시간이 영 정확하지 않은 것 같다.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데 적혀 있던 버스가 예상 시간에 오지 않았고, 그 다음 버스가 다음 예상시간에 도착했다.
버스 내부의 벽면에는 케이블로 충전할 수 있는 단자가 있었다. 이때 내 옆에 앉은 독일인(남성, 맥주 동반)이 나보고 말을 걸었는데 분명 영어임에도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정말 유일하게 1부터 100까지 못 알아듣겠던 순간인 듯….
내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자 버스 문가에 서 있던 남자에게 다시 말을 걸기 시작하더라. 얼핏얼핏 열변을 토하는 것 같았는데 남자도 어쩔 수 없이 받아주는 기색. 진상은 어딜 가나 있다.
체크포인트 찰리
버스에서 내려 몇 분간 걷다 보면 도로 한복판에 세워진 간판이 보인다. 어찌보면 별 것 없어 보이는 이곳이 바로 체크포인트 찰리. 과거 독일이 분단 상태일 때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가로지르는 경계선에 있었던 검문소 중 하나였다. 다른 검문소와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체크 포인트 찰리는 외국인이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검문소였다고 한다.
사실 볼 것이라고는 간판의 사진과 흰 색의 목조 가건물뿐인 곳인데, 이 가건물마저 가짜다. 진짜 검문소로 사용되었던 건물은 현재 베를린 연합군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로 향하는 길목에 있어서 잠깐 들렀지, 단독으로 이곳을 위해 찾아올 만한 곳은 아닌 것 같았다.
저녁 시간이었지만 구경을 하러 온 사람들이 생각보다 꽤 있었다.
검문소가 있었다 함은 이곳이 국경지대였다는 뜻인데, 한때 같은 나라였던 상대방의 나라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이 들었으려나?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동독과 서독은 경제 수준이 상당히 많이 차이나서, 가까운 국경에서 보이는 상대방의 국가 수준이 보이지 않았으려나 싶다. 당시 서베를린 쪽의 건물들은 높은 반면 동베를린쪽은 망명에 이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건물이 많이 없었다는데, 그 사실만으로도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간판 사진 속 소련군 뒤편의 지역이 과거 동베를린이었던 곳. 물론 1960년대 당시 저런 간판이 있었던 건 아니다.
사진 속 민트색 옷을 입은 사람들은 베를린 마라톤 대회 참가자들. 대회 참가를 위해 베를린에 온 김에 관광도 하는 것 같았다. 이 사람들은 이후 베를린뿐만 아니라 체코에서도 보였다.
짤막한 관광 시간을 가지고, 바로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로 이동했다.
버스를 타러 다시 이동하는 길. 하루종일 베를린의 상공을 지키고 있던 열기구도 어느새 내려와 있었다. 어둑어둑하고 사람이 적은 시간이어서 조금 무섭긴 했지만 별 탈은 없었다. LA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 그때는 일정상 밤의 거리를 걸어야 할 때 무서워서 고개를 푹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숙소로 향했었다. 독일을 여행하면서 거리에서 독일 경찰들을 참 많이 봤었는데, 이렇게 길거리에 경찰들을 많이 배치시켜둔 방식이 치안에 상당한 도움이 되어준 것 같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길. 특이하게 시내 버스인데도 시간이 늦었다고 버스 내부의 조명을 환히 켜두지 않았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형제의 키스
체크 포인트 찰리에서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까지는 꽤 오래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지점을 한 데 묶어서 그렇다기보다는,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의 위치가 베를린의 중심가에서 꽤 떨어져 있었다. 때문에 어떤 관광지에서 출발하든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까지 향하려면 꽤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이 날은 비 플랫b-flat이라는 재즈 클럽을 예약해둔 날이었다. 메일로 예약했을 때 8시 45분까지 내 자리를 남겨둔다고 했는데 언제나 그렇듯 여행이란 미리 계획해둔 시간에 따라 딱딱 맞아 떨어지지는 않기 때문에, 심지어 저녁식사를 걸렀음에도 체크포인트 찰리를 떠나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까지 보고 재즈 바로 향한다면 예약 시간 내로 도착하지 못할 게 뻔했다.
나에게 있어서 너무 아름다워서 엄청 보고 싶고 매력적이고 한 관광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베를린까지 와서 놓치고 가고 싶지는 않은 곳이기는 했다. 그래서 결국 재즈 바 입장이 늦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를 보고 가기로 결정했다.
슈프레 강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다양한 그림이 그려진 베를린 장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 어떤 그림이 있는지 열심히 살펴보고 확인해뒀어야 했는데. 피곤에 지친 나머지 이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고, 버스에서 내려서는 형제의 키스를 찾기 위해 내가 버스를 타고 지나온 구간, 형제의 키스가 없는 구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가 아무런 소득도 건지지 못한 채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대참사를 겪고 말았다.
처음에는 버스에서 내려 왼쪽, 즉 남쪽으로 쭉쭉 내려가긴 했었다. 그러나 이렇게 통행을 위해 끊긴 장벽을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의 마지막'이라 생각한 나의 착각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음, 이쪽은 다 봤군' 하고 생각하며 건너편 장벽의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형제의 키스를 두고 반대편으로 가버린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시작된 나의 관람. 한때 베를린의 동서를 갈랐던 장벽을 완전히 철거해버리지 않고 갤러리로 사용함으로써 야외에 시민들이 접할 수 있는 문화공간을 제공하는 것과 동시에 당시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남겨둔 발상이 참 신선했다. 일단 무조건 밀어버리는 우리나라에서는 바랄 수 없는 모습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많은 과거상은 일제강점기 시절 강제로 파괴당했지만.
현대 예술에 관련된 조예가 깊지는 않은 사람이라서 그림 자체에 대한 큰 감명을 받지는 못했다.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도 있다고는 하는데, 1.3km에 달하는 갤러리를 전부 다 보진 못해서 잘은 모르겠네.
슈프레 강을 바로 옆에 끼고 쭉 세워진 베를린 장벽. 베를린 장벽을 넘어가려고 시도하다가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같은 시대상은 아니지만 영화 쉰들러 리스트였던가, 사람들이 반대편으로 넘어가기 위해 장벽을 넘어가던 장면이 겹쳐 떠올랐다. 실제로 서베를린보다 잘 살지 못했던 동베를린 사람들이 장벽을 넘어 대거 이탈했고, 시도한 사람의 수가 10만 명, 그 중에 성공한 사람의 수가 5,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또한 주기적으로 북한에서 망명해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피살될 각오를 무릅쓰고 망명을 결심해올 정도라면 그들이 살고 있던 현실이 얼마나 시궁창이었을지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보는 베를린 장벽이야 위의 사진처럼 그저 얇은 벽으로 보이지만, 당시에는 콘크리트 장벽부터 동베를린의 철조망까지 약 70미터에 달하는 군사 구역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DMZ(비무장지대)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베를린에 존재했던 이 구역은 '죽음의 구역'으로 불렸다.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탈출하지 못하게 각종 감시탑과 지뢰 등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평에 0~50개의 지뢰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그런 구간을 뚫고서라도 망명을 원했다면 그들의 평소 생활은 참 어땠을지.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분단 이후 베를린 장벽이 바로 설치되지는 않았는데(이들은 우리처럼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그로 인해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기 이전에는 동독에서 서독으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망명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독에서는 망명해온 동독 사람들에게 정착 지원금에 연금까지 지급해주었다고. 약 27년간 서독은 동독에다가 35억 마르크를 지불하며 동독의 정치범과 가족들 25만명까지 구출했다고 한다. 물론 그들의 행동이 100% 선의로 이루어지지 않고 냉전이라는 시대 속에서 자유주의를 지키기 위해 행동한 것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사람의 생명을 구해냈으니 잘한 행동이라고 봐야겠지.
나의 얄팍한 예술 감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그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자유를 찾아 밀려드는 사람들 같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의 사진을 많이 찍지는 않았다. 내가 이해하기에는 난해한 그림들도 많았고, 날도 어두워서 카메라로 그림을 담기 어려웠을 뿐더러 이곳을 보고 빨리 재즈 클럽에 가야한다는 생각 때문에 바쁘게 돌아다녔기 때문.
그렇게 형제의 키스를 찾아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오른쪽, 즉 북쪽으로 열심히 걸어 올라갔는데, 장벽 끝의 그림에 도달할 때까지 걸어가도 형제의 키스는 나오지 않았다. 허망했다. 핸드폰으로 지도를 확인해보니, 사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는 내가 내린 곳에서 남쪽으로 훨씬훨씬 더 길게 이어진 장벽이었다. 이미 하루종일 많이 걸은 데다가 신발도 불편한 굽 높은 부츠를 신고 있었던 터라 그냥 포기하고 재즈바로 향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예약 시간에 맞춰 갈 수 없는 시간이었고 '여기까지 와서 형제의 키스를 안 보고 간다고?' 싶은 마음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이겨냈다.
눈물을 머금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b-flat에 가기 위해 버스 노선을 확인하며 캡쳐해뒀던 형제의 키스 위치. 내가 서 있는 파란색 원이 바로 형제의 키스가 있는 곳이다. 내가 열심히 검색할 때는 위치가 안 나오더니, 지금 지도를 확인하니까 떡하니 Socialist Fraternal Kiss: Honecker - Brezhnev라고 적혀 있구나.
정확한 형제의 키스 위치는 아래 지도 첨부.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에서 가장 유명한 형제의 키스. 나는 이 그림이 단순히 통일을 축하하는 의미로 그려낸 가상의 해학적 작품인 줄 알았는데, 러시아와 독일 공산당 지도자였던 레오니트 브레주네프 에리히 호네커가 실제로 저렇게 입맞춤을 했었다고 한다. 그림의 부제는 '주여, 이 치명적인 사랑을 이겨내고 살아남게 도와주소서'.
이 늦은 시간에도 형제의 키스 앞에는 사진사가 한 명 서 있었다. 형제의 키스 앞에서 사진을 찍기 원하는 관광객들에게 돈을 받고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카페는 4시면 문을 닫고 일요일에는 대부분의 가게가 영업하지 않는 독일의 일요일, 이런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고 있던 사진사가 상당히 부지런해 보였다.
관람을 마치고 차도를 건너 버스를 타러 갔다. 날씨가 꽤나 쌀쌀했다. 체력이 서서히 방전되어가고 있어서 가만히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일조차 무척이나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타야 하는 300버스가 구글에 표시되었던 버스 시간을 지키지 않고 증발해버렸고, 나는 그 다음 버스를 타야 했다.
원래의 예정대로라면 Curry 61에 들러 커리부어스트도 맛보려고 했는데, 피로가 누적되는 바람에 속까지 안 좋을 낌새라 슬프게도 포기하고 말았다. 결국 커리 부어스트의 본고장인 베를린에서는 정작 맛보지 못하고 떠났다는 슬픈 현실. 드레스덴에서 먹은 커리 부어스트가 그렇게 맛있을 줄 알았더라면 다른 일정을 포기하고서라도 베를린에서 커리 부어스트를 최소 두 번은 먹고 떠났을 것이다.
어쿠스틱 뮤직&재즈클럽 비 플랫(Acoustic Music & Jazzclub b-flat)
알렉산더 플라츠 역 근처에서 내려 열심히 걸었다. 10분 넘게 거리를 걷자 내가 보아두었던 익숙한 간판이 눈에 띄었다.
시간은 상당히 늦었기에 내가 입장할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하는 마음을 안고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갔다. 재즈 클럽이 있는 지하에서는 음악소리와 박수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베를린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무난한 곳이라는 재즈클럽 비 플랫b-flat은 음료 비용 말고도 따로 입장료를 내야 했다. 비 플랫은 오로지 현금만 지불이 가능했다. 원래 예약했었는데 늦었다는 사과의 말과 함께, 내려가던 계단 중간의 미니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직원에게 입장료를 지불했다. 직원은 괜찮다고 말하며 내 손등에 비 플랫 도장을 찍어주었다.
이때 계단에 서서 잠깐이라도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귀 기울였다면 참 좋았을 텐데.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비극적이게도 이날 내가 방문했을 때 공연했던 팀의 음악 스타일이 나와 정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보니 이미 무대를 잘 볼 수 있는 좋은 자리는 만석. 어쩔 수 없이 계단 뒤편의 작은 테이블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테이블이 작을 뿐더러 의자도 등받이가 없는 높은 간이 의자인 터라 편히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원래는 재즈 클럽에 방문하면 해피 아워 시간에 칵테일을 마시려고 했는데 커리 부어스트도 먹지 못한 판에 잘 받지도 않는 술을 마실 수는 없었다. 마셨다가는 집에 못 돌아갈 것 같았다.
나의 눈에 띈 건 콜라 한 잔. 바에 와서 콜라만 한 잔 시키는 건 비매너가 아닐까 한참을 고민하는데 직원이 주문을 받으러 찾아왔다. 콜라 한 잔(L사이즈)만 주문이 가능할까 물어보니 흔쾌히 주문을 받아주었다.
지불은 후불제였다. 주문을 하고 촬영을 위해 액션캠을 세워두며 잠시 기다리니 직원이 콜라 한 잔과 함께 프레첼 과자도 가져다 주었다. 콜라야 뭐 다들 아는 맛이지만 저 프레첼이 정말정말 내 입에 맞지 않았다. 이런 기본적인 안주가 내 입맛에 맞지 않기도 참 힘들텐데, 왠지 화장실 냄새, 찌린내 같은 향이 올라오는 것 같아 몇 번 먹기를 시도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어느 정도였냐면, 내가 콜라만 시켜서 보복성으로 이런 과자를 준 건가 싶어질 정도였다.
무대와는 꽤 거리가 있는 위치. 하지만 보러온 게 아니라 재즈를 들으러 온 곳이었으므로 상관없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역시나 좌석이 불편하다 정도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의 안일함으로 인해 하나 예상치 못하게 직면하게 된 문제가 있었는데… 이 음악가들의 재즈가 나와는 정말정말 맞지 않았다.
9월 24일자의 공연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So. 24.09.2023 | 21:00 |
New Trio -
Alex von Schlippenbach,
Rudi Mahall,
Dag Magnus Narvesen
Modern Jazz
Alexander von Schlippenbach (p), Rudi Mahall (b-cl), Dag Magnus Narvesen (dr, perc)
보다시피 피아노 연주자와 드럼 연주자의 페이지도 있었다. 클라리넷 연주자인 루디 마할도 검색해보면 충분히 나오는 연주자였고. 문제의 원인은 내가 미리 이들의 음악을 확인해보지 않고, 그저 '재즈 클럽 가볼래! 예약해야지!' 하고 덜컥 찾아간 데에 있었다. 분명 사람들의 후기 글에서 그날 연주하는 연주자들을 검색해보면 유튜브 등에 충분히 영상이 나오니 미리 들어보고 가라는 내용을 봤었는데, 이를 제대로 마음에 새기지 않은 내 잘못이 컸다. 적어도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면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은 내게 해석이 어려운 현대미술과도 같았다. '이게 정말 음악이야?' 싶었다는 뜻이다. 주기적으로 연주를 하고 나름 위키에도 나오는 사람들이면 분명 무명이 아닐 텐데(정규 팀은 아닌 것 같았다), 나의 귀에 들려오는 클라리넷의 선율은 마치 소음과 같았다. 어린 아이가 처음 리코더를 잡아서 아무거나 막 부는 느낌이었다. 이걸 듣기 위해 나는 전전긍긍하며 급한 마음으로 여행지를 돌아본 것일까. 이걸 위해 커리 부어스트도 포기하고…….
한 30분 정도 지났나. 내가 늦게 들어온 탓에 금세 쉬는 시간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게 쉬는시간인지도 몰라서 갑자기 인사를 하고 무대 뒤로 퇴장해버리는 연주자들의 행동에 적잖이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비플랫 입장료만 해도 25유로인데. 벌써 끝났다고? 아직 10시인데, 공연을 한 시간만 하고 나머지 시간은 그냥 바로 운영하는 거였나? 나는 이 잠깐의 시간동안 내 취향도 아닌 음악을 듣기 위해 25유로를 투자한 것인가? 연주가 끝나자 나가는 사람들도 있어서 의심은 더 커졌다.
조용해진 실내에서 눈물을 머금고 콜라를 마셨다. 다리가 아프기도 했고 콜라를 버려두고 가기에도 아까웠고, 혹시나 하는 마음도 있었다. 계단 근처의 자리에 홀로 앉아 콜라를 마시고 있으니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기도 했다. 나는 내 콜라와 쓰레기나 다름 없는 프레첼이 든 유리그릇을 들고 자리를 옮겼다. 계단 앞 소파 자리에 앉으니 몸이 훨씬 편했다.
빈 자리에 새로운 사람들이 와서 자리가 채워졌다. 다행히도, 연주자들이 퇴장한 건 쉬는 시간을 위해서였다. 조금 후에 다시 연주자들이 들어왔고 연주가 시작되었다.
사실 쉬는 시간 이후 연주가 다시 재개되며, 쉬는 시간 전에 들었던 음악은 그저 그 음악만이 이상했을 뿐이고 이제부터는 조금 친숙한 음악이 연주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나의 기대는 산산조각으로 깨졌다. 마찬가지의 음악. 클라리넷을 불며 손가락을 아무렇게나 놀려 나오는 듯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정말 취향에 맞지 않으면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켰던 이유는 이곳에 오기 위해 사용한 시간과 노력, 그리고 돈이 아까워서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음악에 대한 나의 평가를 믿을 수 없어서이기도 했다. 내 앞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각자 술을 한 잔씩 하며 얌전히 앉아 난해한 음악을 듣고 있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이 음악을 문제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건가 싶어졌다. 내 음악에 대한 지식이 그들보다 부족해서 이해를 하지 못했나? 조금 더 들어보면 나도 그들처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내 발목을 잡았다.
중간에 화장실에 들르는 사이에도, 먼 복도까지 클라리넷의 소음이 가득 찼다. 지금 이 글을 적으면서도 정말 내가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린 건지, 음악 알못이라 이러고 있는건지 상당히 혼란스럽다. 하지만 예술은 내가 별로면 말짱 꽝이다. 사이 톰블리의 작품이 5290만 달러에 팔린다고 해서 그게 나에게까지 가치 있는 작품은 아니듯이.
11시가 되어 두 번째 쉬는 시간이 찾아왔다. 연주자가 떠난 비플랫 무대의 모습. 생각보다 그리 크지는 않은 규모였다.
이 때가 되도록 나는 그들의 음악을 이해할 수 없었다. 베를린 3대 재즈 클럽이라고 해도 재즈 연주자의 음악이 나와 맞지 않으면 말짱 꽝이구나. 왜 사람들이 비플랫이 베를린 3대 재즈 클럽 중 가장 호불호가 '덜한' 클럽이라고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곳은 개인의 음악 기호가 상당히 강력하게 작용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유럽에 와서 재즈 클럽을 경험해보았다는 것 자체로서는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비록 원치 않는 소음만 듣고 왔다는 감상이 크기는 하지만, 한국에 살면서 또 언제 이런 곳을 가보게 될까? 물론 우리나라에도 이런 재즈 클럽이 어딘가에 있기는 하겠지만 유럽처럼 대중화된 문화는 아니니까 말이다.
계단 뒤편에 있는 카운터에 음료 값을 지불하고 재즈바를 나왔다. 날씨는 쌀쌀하고 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아도 어느정도 있었다. 숙소까지 걸어갈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추운 날씨에다가 아무리 안전하다 한들 여자 혼자 밤늦게 걸어다니는 일이 불안할 수밖에 없어 근처 정류장으로 가서 트램을 탔다. 숙소로 돌아온 나는 다음날 체크아웃을 하고 드레스덴으로 떠날 준비를 대강 마친 후 어렵사리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