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te Light Pink Flying Butterfly [독일 동유럽 여행] #7.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베를린 마라톤 대회,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 카이저 빌헬름 교회

[독일 동유럽 여행] #7.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베를린 마라톤 대회,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 카이저 빌헬름 교회

TRIP/2023 독일 체코 헝가리 오스트리아 2023. 10. 24.

[독일 동유럽 여행] 

#7.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베를린 마라톤 대회,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 카이저 빌헬름 교회

 

 

2023. 9. 24. (일)

 

더 반 카페에서 카푸치노를 한 잔 마신 후, 제너레이터 베를린 미테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숙소까지 다시 돌아가는 이유가 다른 것도 아니고 오로지 '화장실' 때문이라는 사실이 스스로도 없었지만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무료 화장실(심지어 깔끔하기까지 함!)을 내버려두고 굳이 돈을 내가며 유료 화장실을 사용할 이유도 없었다. 이 근처에 마땅한 화장실이 보이지 않기도 했고.

 

길을 가다가 발견한 곳. 이렇게 건물로 둘러싸인 넓은 공터가 참 신기하다. 땅덩어리가 넓어서 부럽다.

 

길을 가다 보였떤 왼쪽의 놀이터.

 

 

그나마 베를린의 밋밋함을 덜어주는 건 발코니 등으로 단순히 평면이 아닌 건물의 구조 때문이 아닐까?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발코니를 그냥 방치해두기만 하지 않고, 나름 꽃이나 장식으로 꾸며두고 있었다. 이 발코닌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보였고.

 

결국 다시 돌아온 제너레이터 베를린 미테. 이미 오전과 낮동안 많이 걸었어서 불편한 부츠를 갈아신고 갈까 고민했지만 결국은 원래 입었던 옷 그대로 나왔다.

 

아침과 달리 사람이 많아진 도미토리 근처의 거리. 이때도 몰랐는데 자세히 보면 여기에도 베를린 마라톤 대회 참가자들이 보였다.

 

 

브란덴부르크 문과 2023 베를린 마라톤 대회

 

다시 일정을 재개했다. S반을 타고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의 역으로 향하는 길. 

 

지하철을 타고 정거장을 이동해 목적지에 내리자, 베를린 마라톤 대회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잔뜩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인파를 거슬러 올라가는데 마라톤을 하고 온 듯한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상으로 올라갈수록 더 그랬다.

 

 

아니나 다를까,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는 베를린 마라톤 대회가 한창이었다. 내가 하루종일 베를린을 활보하며 만났던 러너들은 죄다 이 대회에 참가하러 온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브란덴부르크 문을 구경하며 촉촉하게 나의 베를린 캠페인을 회상하려 했던 나의 계획이 이 활기차고 열정적인 분위기에 무참히 무너지던 순간이었다. 사람들의 환호 소리와 어디선가 들려오는 신나는 노래, 엄청난 인파, 온갖 곳에서 다 같이 모여 사진을 찍는 사람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딱 그 꼴이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해서 브란덴부르크 문의 사진을 찍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기도 한 건 사실이었다. 비록 내가 원한 풍경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브란덴부르크 문의 중심부는 오로지 마라톤에 참가한 사람들만이 지나갈 수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브란덴부르크 문이 결승지점인 건 부러울 만했다. 비록 우리나라에 이런 멋진 골이 있다 한들 운동을 싫어하는 나는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지 않겠지만.

 

당시에 생각지도 못했던 마라톤 대회를 맞닥뜨린 충격이 컸는지, 정작 문에 칠해진 붉은 빛과 주홍 빛의 색을 보지 못했다. 뒤늦게 사진을 정리하면서 브란덴부르크 문의 사진을 보는데 무슨 살인 사건이라도 난 것마냥 붉게 물든 기둥이 보였다. 바로 구글에 검색해 브란덴부르크 문의 사진을 확인했는데 붉은 색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처음엔 내가 보정을 너무 과하게 해서 평범한 얼룩이 저렇게 붉게 보정된건가 의심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내가 브란덴부르크 문을 보기 일주일 전인 2023년 9월 18일, 기후활동가들이 화석연료 사용 중단을 요구하며 브란덴부르크 문에 스프레이 테러를 했다고 한다(…).

 

연합뉴스 기사

왜 하필 내가 가기 직전에 이랬는지 너무 서글프다. 테러 이후 스프레이 자국을 닦아내기는 했지만 완전히 지워내지는 못해 내가 본 브란덴부르크 문의 모습이 그모양 그꼴이었던 것. 이거 참 어두운 나의 시야를 칭찬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마라톤 대회 루트가 브란덴부르크의 정면을 가로지르는 탓에 브란덴부르크의 한쪽에서 반대쪽으로 지나가는 일도 신호등을 기다리듯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당연히 신호등이 있을리는 없고 관리요원들이 일정 시간마다 길을 내어주는 식. 오래 기다렸다.

 

 

건너가는 길도 일방통행. 사진을 찍고 있으면 빨리 지나가라고 재촉했다.

 

 

베를린에서 가장 유명한, 베를린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인 브란덴부르크 문도 독일의 다른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어쩐지 단결과 힘, 승리를 외치고 있는 것 같다. 한때 나치의 거점이 이곳에 있어서 연합군이 이 문 저편의 나치 본거지를 점령하기 위해 분투했다던가. 이후에 동독과 서독을 나루는 경계로 작용하고, 베를린 장벽에 세워진 여덟 군데의 검문소 중 한 곳을 담당하기까지 했으니 독일의 역사와 깊게 얽혀 있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바글바글한 사람들. 좋게 말하면 활기찼고, 나쁘게 말하면 정신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역사적 건축물이 현대의 행사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풍경은 부럽다.

 

나중에 사람들이 다 빠질 밤 시간에 다시 와볼까도 생각했는데, 결국 이날 밤에 브란덴부르크 문을 다시 가지는 못하고 다음 날 아침 베를린을 떠나기 전 다시 한 번 들르게 되었다.

 

 

아쉬운 대로 브란덴부르크 문의 중심은 아니지만 가장자리를 통해 문을 넘어갔다. 위의 조각상은 기둥 안에 들어있던 조각상. 역시나 힘차보인다.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Denkmal für die ermordeten Juden Europas)

 

바글바글한 인파를 지나쳐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로 향했다. 베를린을 떠나 드레스덴으로 향하기 전 들를까 고민했던 곳이기도 하지만 거리가 꽤 가까워보여서 브란덴부르크 문을 오게된 겸 함께 들를 생각이었다.

 

얼마 걷지 않아 기념물이 있는 공간이 나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철조망을 마주하게 되었다. 공사인가? 여기까지 와서 들어가지 못하고 멀리서만 보고 돌아가야 하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아니었다. 철조망으로 막아둔 공간은 기념물이 세워진 넓은 공간 중 일부였고, 다른 공간은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 말 그대로, 나치 정권 시절 학살되었던 유대인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만들어졌다. 베를린이라는 도시 한가운데에 이 넓은 부지를 투자하면서 과거 전쟁과 학살의 비윤리성을 상기시키고 그 과정에서 희생되었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기리는 취지는 감히 우리나라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같아서 씁쓸함이 차올랐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시점에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하고 있어서 참 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그냥 다 평화롭게 살 수는 없는 거냐고! 

 

서로 각기 높이가 다른 조형물들은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높이가 높아진다. 조형물 사이로 뚫린 길목은 의도적으로 높낮이를 준 것 같았다.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면 어느새 조형물들이 나보다 훨씬 커져 위압감을 주고, 내리쬐던 빛이 조형물에 가로막히면서 주변이 어둡고 삭막해진다.

 

하지만 각자 층계가 다르기에 높은 건축물의 윗부분은 여전히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후기를 보면서 '높은 건축물은 당시 유대인을 둘러싼 억압을 나타내지만, 여전히 위를 비치고 있는 빛은 희망을 나타낸다'는 해석을 본 적 있었다. 그러한 내용을 이미 접하고 갔기에 내가 이곳에 서서 느낀 감상이 그 후기와 비슷해진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품의 세밀한 의도가 어떻게 됐든 이 공간이 추모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공간인 만큼, 이곳에 서서 당시에 학살된 유대인을 생각할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도로변에 있는 낮은 조형물들은 흡사 사람들이 묻힌 관처럼 보이기도 했다.

색상이라고는 조형물을 비추는 붉은 노을뿐인 잿빛의 삭막해보이는 공간이지만, 이곳에 들르는 사람들의 마음은 절대 그렇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데, 비슷한 일이 2023년에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참 믿기 힘들다.

 

 

이 밑으로는 크툴루의 부름 베를린 캠페인 스포일러 포함.

 

기념물을 떠나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베를린 캠페인에 등장했던 장소 중 하나인 카이저 빌헬름 교회로.

그런데 생각외로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에서부터 카이저 빌헬름 교회로 갈 수 있는 교통편이 마땅치가 않았다. 도로를 보면 그렇게 많은 트램이 다니고 역도 심심찮게 보이는데, 유럽의 유럽의 대중교통은 다 이랬다. 너무 오래 전에 지어져서 그런가, 잘 되어있는 것 같으면서도 노선이 이상하다. 

이번에도 내 기준 얼마 되지 않는 거리를 이동하기 위해 버스를 몇 번 갈아타야 했다. 갈아타지 않으려면 한참 후에 있는 버스를 기다려야 했는데 나에게 그런 넉넉한 시간이 있을 리가 없었다.

 

포츠다머 플라츠역 앞에서 찍은 사진들. 포츠다머 플라츠의 이름이 왜 이렇게 익숙한가 했더니 아무래도 포츠담 선언이 자꾸 생각나서 그랬던 듯.

 

버스에서 내려 다른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을 이동하면서 찍은 사진. 해가 질 즈음이라 색이 참 예뻤다. 독일에서의 낙서는 정말 어딜 가나 있다.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도착한 정류장은 지도에 표기된 위치와 조금 차이가 있었다. 의자도 하나 없이 달랑 간판 하나만 서 있어서 불안했는데 버스가 잘 도착하기는 했다.

 

버스가 올 때까지 15분 이상의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어서(우리나라의 수도였다면 이럴 일은 없었을 텐데) 그 사이 앉아서 쉴 곳을 찾았다. 정류장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니 그냥 옆에 보이는 계단 난간으로 가서 앉았다. 건물 앞 공터에서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청년들이 상당히 많이 보였다. 그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버스를 탔다.

 

 

 

 

카이저 빌헬름 교회

버스를 타고 쭉쭉 이동하다가 샤를로텐부르크 지구의 유로파 센터 앞에서 내렸다. 

 

 

조금은 당황스러웠던 신관 건물의 크기. 내가 향하는 방향에서 카이저 빌헬름 교회를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카이저 빌헬름 기념 교회

도착!

바로 옆에 다른 건물, 심지어 공사중인 것 같은 거대한 건축물 때문에(이게 신관 건물이라는 사실을 안 건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였다) 멀리서 찍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가 찍은 사진. 

 

JS PEARSON JOSEPH@CANTAB.NET

원래는 카이저 빌헬름 2세가 할아버지인 카이저 빌헬름 1세를 기리기 위해 이 교회를 세웠다. 과거 1890년대에 세워졌을 당시에는 멀쩡한 교회의 모습이었지만, 1943년 및 1945년 세계 2차 대전 당시 폭격을 받아 지금은 탑만 남은 상태다. 독일인들은 당시의 전쟁의 무서움을 기억하고 전쟁의 발발을 경계하기 위해 이 교회를 재건하거나 철거하지 않고 폭격당한 모습 그대로 잔재를 남겨두었다.

 

때문에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모습은 폭격의 흔적이 그대로 남은 건물의 모습이다. 뾰족한 끝이 날아간 탑과 이제는 남아 있지 않은 유리. 내부도 들어가볼 수 있지만 나는 저녁 시간대에 이곳에 방문해 내부에 들어가볼 수는 없었다.

 

가까이 다가서면 전쟁의 흔적을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뻥 뚫려서 뒤편의 건물이 보이고, 군데군데 파괴의 흔적뿐만 아니라 불에 그을린 검은 부분들이 남아 있다. 때문에 카이저 빌헬름 교회의 다른 별명은 '썩은 이빨', '충치'다. 네모난 현대식 건물들 사이로 뾰족하고 검은 탑이 하나 솟아있는 모습은 확실히 충치를 닮긴 했다.

 

그리고 카이저 빌헬름 기념 교회의 옆에 세워진 건물이 카이저 빌헬름 교회 신관이다. 앞뒤로 지어진 건물 두 개중 하나만 신관인 것 같은데, 사진 속 교회의 뒤로 보이는 공사현장 같은 높은 건물은 대체 뭔지 아직도 알아내지 못했다.

 

신관의 내부 또한 푸른 빛의 독특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유명하지만, 구관과 마찬가지로 이미 운영을 종료한 시간이어서 내부를 살펴보지는 못했다. 아름답다는 내부 인테리어와 달리, 내가 보고 온 신관의 외관은 사실 그렇게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벌집같이 생긴 팔각형의 낮은 건물. 그 정도의 감상이었다.

 

 

여기에서 또 베를린 캠페인 생각을 하는 나는 역시나 오타쿠다. 군데군데가 검게 그을려 독특한 기념물이 된 카이저 빌헬름 교회는 그 자체로서도 매력적이고 의미 깊은 기념물이었지만, 카이저 빌헬름 기념 교회가 나의 주된 목적이 된 이유는 바로 이 탑이 베를린 캠페인의 배경이 되어주었기 때문이었다. 내 여행 1순위가 페르가몬 박물관이었던 이유도 그곳이 베를린 캠페인에 나와서였던 것처럼 이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여행을 하며 당시 탐사자들이 방문했던 스팟들을 나 또한 방문해 추억에 젖고 싶었으나 전쟁 이후 거의 갈아엎어진 베를린에서 1920~1930년대의 역사를 찾기란 어려웠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었던 로마니셰스 광장, 처음의 의뢰를 받았던 호텔과 극장, 거리 등등등 전쟁 이후로 남아있는 곳이 없었다. 여행을 계획한 계기가 바로 베를린 캠페인이었는데 정작 베를린에는 내가 추억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서 너무 아쉬웠었다. 

 

그래도 고맙게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카이저 빌헬름 교회 덕분에 세션 내용을 가만히 떠올렸다. 아, 이 교회 앞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모든 것이 끝났구나. 베를린에서 살아본 적도 없는 내가 1920년대의 베를린의 지리를 잘 알 턱이 없었다. 1부: 악마는 파리를 먹는다를 플레이할 때 우리는 다함께 로마니셰스 광장에서 시작했다. 당시 처음 1부를 플레이할 때도, 3부에서 마지막을 마무리할 때도 이 로마니셰스 광장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로마니셰스 광장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여행 준비를 하면서 베를린 캠페인에 등장했던 지명들의 위치를 하나하나 파악할 때였다. 알고보니 로마니셰스 광장이 바로 카이저 빌헬름 교회가 있는 광장이었다. 캠페인의 시작 이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끝을 맺은 것이었다.

 

내가 교회를 올려다보는 이곳, 캠페인 속 대공황이 진행되던 시기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찾으러 이 탑 앞에 모여들었고, 곳곳에서 카메라가 돌아갔다. 우리와 함께 했던 탐사자들이 이곳에 서 있던 모습을 상상하는 순간을 잠시나마 가졌다.

 

 

 

카이저 빌헬름 교회를 보고 난 이후 체크 포인트 찰리와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를 보러 가기 전 쇼핑몰이 몰려있는 이곳에서 화장실을 미리 갔다오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매 편마다 화장실 얘기하네). 인터넷으로 서치중 무료화장실을 확인할 수 있는 사이트를 발견. 그쪽을 이용해보려고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오늘은 일요일이어서 대부분의 쇼핑센터가 닫는 날이었다(……). 

그렇다. 독일은 일요일에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유료 화장실조차 이용이 불편했다. 심지어 비키니 베를린처럼 나름 큰 쇼핑센터도 문을 닫아버린다. 그나마 다행히 유로파 센터는 영업을 하고 있어서 그쪽으로 향하는데 야외에 설치된 유료 화장실을 발견했다. 카이저 빌헬름 교회 바로 옆이었다.

 

 

가격은 0.5유로. 1유로를 예상하고 갔던 터라 비교적 저렴하게 느껴졌다. 벽의 한쪽에는 돈을 교환할 수 있는 기계도 있었고, 직원이 상주하고 있어서 화장실 내부는 아주 깨끗했다. 

 

다음은 체크 포인트 찰리와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그리고 재즈클럽 비 플랫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