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te Light Pink Flying Butterfly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후기: 내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누군가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후기: 내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누군가

REVIEW/BOOK REVIEW 2025. 4. 22.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후기: 내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누군가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눈물을 글썽이다가 바로 적는 후기.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부모를 주제로 하는 책은 피하고 싶었다.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무게가 나로서는 감당하기가 너무 무거워서. 하지만 이럴 때 내가 참여하고 있는 독서 모임이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바로 내가 평소에 관심이 없던 책도 강제로 읽게 하는 것. 정지아 작가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엄연히 말하자면 독서 모임에 선정된 책은 아니었다. 원래는 「제3의 강둑」이라는, 세계문학집에 실린 짧은 단편글이 주제였으나, 이번 주는 이 짧은 글만 읽으면 되겠구나 하고 행복에 젖어있던 나에게 강사님은 '아버지'를 주제로 한 책을 찾아 읽어오라는, 모임 계획서에는 없던 지시사항을 폭탄처럼 던지셨다. 일주일간은 내가 그간 읽지 못했던 다른 책(엄연히 말하자면 웹소)이라도 읽으려 했건만.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도서관에서 급히 아버지를 주제로 한 책을 찾아 한 권 집어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보통 가족소설이라고 한다면 내용이 전하는 메시지는 어찌 보면 뻔해 보인다. 사랑, 희생, 기타 등등의, 원하든 원치 않든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피붙이 사이에서 일어나는 농도 짙은 감정들. 나 자신이 가족에게 그리 살갑지 않은 사람이기에 그러한 무겁고 진득한 감정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편이다. 그나마 이 책을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쉽게 읽어 내려갈 수 있었던 까닭은,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이 정이 많고 친절한 캐릭터라기보다는 부모와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가지고 있는, 제법 시니컬하고 합리적인 여자였기 때문이다. 가령 제게 곰살맞게 구는 아버지의 정치적 동료였던 박동식이 제게 오빠라고 부르는 대목에서, 주인공은 아버지의 장례식장인데도 '혈육 하나를 보내고 둘을 얻었으니 손해 본 장사는 아니라고 해야 할지 어째야 할지'라고 생각한다. 이런 시니컬한 성격이 제법 나랑 잘 맞았고 큰 부담을 덜어내고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오히려 나의 독서가 힘들었던 지점은 거의 대부분의 대사를 이루고 있는 전라도 사투리였다. 들으면 알 수 있는데, 이게 글자로 풀어져 있으니까 단순히 읽는 것만으로는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쉽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글자를 읽고 머릿속에서 뇌내발음을 돌리는 작업을 한 번 더 거쳐야 했다. 그러면 내용이 이해가 되었다. 아무래도 이 책은 소설이기는 해도 작가의 실제 이야기를 어느 정도 옮겨 담은 소설이라서인지, 작가가 지내왔던 고향의 정취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이런 방식을 택하지 않았나 싶었다. 덕분에 소담한 마을의 분위기가 잘 느껴지기도 했다. 어쩌겠어요. 진도가 빠르게 나가지 않은 건 사투리를 잘 알지 못하는 내 탓인 것을.

 

책의 시작은 아버지의 죽음이다. 그의 사인은 간단하게만 요약되어 등장하고, 책의 모든 이야기는 아버지의 장례식, 사흘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아버지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인연들을 마주하며 주인공이 몰랐던 아버지를 차차 알아가고 감정적으로 아버지라는 존재를 받아들이게 되는 내용이다. 나의 일평생을 같이 살았던 조부모님을 떠나보낼 때, 두 번의 장례식을 치렀던 나는 그때의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은 고됐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위로하며 눈코뜰 새 없이 바쁜 까닭에 오히려 지독한 슬픔을 한 발짝 멀리 밀어낼 수 있었던 자리였다. 그리고 책을 읽어 내려가며 나중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나이를 먹고 조부모님을 떠나보내는 장례식을 지켜본 이후로 생각하게 된,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미래를 생각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이런 내용들은 차치하고, 책을 읽기 전에 몰랐던 또 다른 한 가지는 이 책이 뼈아픈 근현대사를 담고 있다는 점이었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소위 '빨치산'이라는 멸칭으로 불리는 사회주의자였다. 자연히 주인공은 빨치산의 딸이다. 과거 전쟁 이후 민주주의를 짓밟고 민중의 머리 꼭대기에 서서 군림하려고 했던 시대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그저 단순히 교과서의 내용 정도로만 알고 지냈던 나로서는 빨치산이라는 낙인이 이렇게나 잘못도 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무시무시한 꼬리표였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강사는 분명 '아버지'를 주제로 책을 고르라고 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들의 살아왔던 부조리한 인생에 더욱 집중을 하는 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사회과학도였나보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과연 모든 사람들을 핍박하려고 사회주의를 택했을까. 지금은 사회주의가 실패한 이념이라고 널리 받아들여졌지만, 그 시절 사회주의를 믿었던 사람들은 진심으로 평등을 바라고 그를 위해 하나의 이념을 택했을 뿐이다. 결코 어린아이를 앞장 세워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을 죽이던 군부 시절의 인간들보다 무조건적으로 악하지 않다. 조선을 수탈했던 친일파들은 제대로 척결되지 않았는데, 혁명을 꿈꿔 앞장섰던 사람들의 인생이 철저히 짓밟히고 평생 사람들의 시선이 뒤따르며, 그 그림자가 자녀와 가족들에게까지 드리워졌다. 대체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왜 이모양인지 알 수가 없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 배제되어 버리는 기분은 무엇이었을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니 주인공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어릴 적부터 빨갱이의 딸이라고 손가락질받으며 남들의 눈치를 보고, 아버지는 감옥에 끌려들어가 어머니 홀로 그 부재를 감당해야 하는 걸 보아왔던 시절을 경험했으며, 제 아버지 때문이라며 제게까지 역정을 내는 친척들까지 있다면, 나라도 내 신세를 한탄했을 것이다. 이따금 나도 내 아버지의 모난 성격을 닮은 것 같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풍파가 많았던 그녀는 오죽했을까. 비록 아버지가 어떠한 잘못도 하지 않았을지라도 원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 번만 와도 되는데. 한 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설켜 품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

 

인구 2만 5천의 작은 구례에서 살았던 아버지의 장례식장에는 그가 생전에 맺었던 인연들이 수도 없이 찾아온다. 물론 주인공이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오기도 했지만, 책의 내용은 그보다는 아버지의 지인들을 집중해 조명한다. 그럼으로써 주인공은 그가 모르고 살았던 아버지의 삶을 바라본다. 나도 이따금 궁금할 때가 있다.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나이일 때의 부모는 청춘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을까. 그곳에도 내가 모르는 세상이 펼쳐져 있겠지. 내가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내가 쌓아 올린 것보다도 훨씬 더 켜켜이 쌓인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단순히 누군가의 어머니나 아버지가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일 테다. 내심 부모님의 과거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는데,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싶기도 했다. 

 

비록 나 또한 살갑지 못한 자녀고, 특히 지금은 아버지와 멀리 떨어져 살고 있지만 그래도 핏줄은 핏줄인가 보다. 처음 책을 펼쳤을 때 대체 이 아버지라는 남자는 왜 이러고 사나, 짜증 난다 싶었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나의 가족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으니까. 가족이란 대체 뭘까? 왜 나한테 이리도 대가 없이 잘해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이렇게 받고만 있으면서도 선뜻 사랑한다는 표현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다. 어쩌면 긍게 사람이지. 가 나에게도 적용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사렘이 오죽하면 글겄냐. 긍게 사람이지. 주인공과 작가의 아버지의 말 중에서 그 말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사람은 너무 어렵다. 왜 이렇게 나한테 잘 대해주는지도 모르겠고 왜 이렇게 꼬일 대로 꼬이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이니까 그런 것이다. 사람이니까 실수할 수도 있고, 사람이니까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 늘 나에게 관대하지 못한 나에게 이 말이 도움이 될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다. 사람은 참 다채롭다. 누군가에게는 빨갱이, 누군가에게는 도움을 준 사람,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앞날을 가로막은 사람.

 

이어지는 작가의 말을 보며 정말로 책은 내가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세계의 간접체험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느꼈다.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군부정권 시절의 사회주의자들과 그 가족의 고단한 삶을 알지 못했을 것이고 작가가 환갑이 다 되어 깨달은 아버지의 가르침도 이리 일찍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책의 이런 점이 참 좋다. 가끔은 나만 이런 건 아니구나, 하고 공감하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알지 못했던 인간이라는 시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활자로 된 세계.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활자 하나하나에 꾹꾹 녹아 있는 책들로, 나도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니까 사람이지, 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내 주변을 사랑할 수 있는 누군가로.

 

 

 

* 진짜 딴소린데, 큰 뜻을 이루려면 역시 가족은 만들면 안 되는구나 하는 시답잖은 생각도 반짝 들었다. 진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