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모 「파과」 후기: 인생에 남겨진 과거라는 알맹이
REVIEW/BOOK REVIEW 2025. 4. 17.
구병모 「파과」 후기: 인생에 남겨진 과거라는 알맹이
벌써 4월에 네 권의 책을 읽었다. 독서모임에 선정된 책을 읽는 동시에 친구들과 하고 있는 독서모임 책까지 읽어내다니! 그것도 4월 말에 닥쳐서 읽은 것도 아니고 4월 중순에 끝내버리다니. 기특하다!!
파과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내가 한창 뮤지컬에 빠져 있을 때 신성록 배우가 파과를 한다는 이야기를 얼핏 보게 된 덕이었다. 마침 그때 신성록 배우가 주연을 했던 뮤지컬 드라큘라를 잘 봤었기에 배우에 대한 호감이 있었고(팬심 아님) 연습하는 짤막한 영상이나 사진을 보니 분위기가 누아르 느낌이라 작품에 대한 조금의 호기심을 가졌다가 말았었다. 한동안 잊고 있던 파과를 친한 친구가 읽기 시작해 다시금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신성록이 파과 뮤지컬 하던데"라는 말을 흘렸었는데, 그 말로 인해 친구는 파과를 읽는 내내 '대체 신성록의 누구야'라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더랬다(그리고 그 비슷한 현상이 나에게도 일어났다).
4월의 독서모임 책으로 이 책을 선정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4월 30일에 영화 파과가 개봉될 예정이라는 소식을 접해서였다. 포스터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연륜 깊은 여성의 얼굴에서 이 영화를 꼭 보고 싶다는 관심이 크게 생겼던 것 같다. 그리고 이미 읽은 친구와 감상을 공유하고 싶기도 했고~
포스터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파과는 노년의 여성 킬러, 조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잘 나가는 또다른 킬러, 투우가 가진 '젊고' '남성'이라는 키워드를 생각하면 두 사람은 정반대의 대칭점에 서 있다. '노인'과 '여성', 생각해 보면 이들은 많은 면에서 대칭점에 있는 사람들보다 사회적 약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내가 '노년 여성 킬러라니, 흥미로운 소재다'라고 느끼는 것 또한 그만큼 '노년 여성이 얼마나 해낼 수 있는가'에 대해 한계를 그어놓은 사회적인 시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책을 읽기 시작한 초반에 아주 우스운 상황이 벌어졌었다. 친구들이랑 놀러가기 위해 탑승한 기차에서 책을 읽겠다는 일념 하에 파과를 가져갔지만, 결국은 오랜 시간 동안 핸드폰이나 하며 딴짓이나 하다가 도착이 임박해서야 그래도 조금이나마 내용을 읽겠다고 책을 펼쳐든 것이다. 자리에 앉아 있는 임산부의 이마를 밀어대며 패악을 부리는 노년의 남성과 이를 크게 말리지 않는 탑승객들. 책의 시작은 이렇게, 여자라면 읽기만 해도 부글부글 끓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문제는 내가 몇 페이지를 읽지도 못하고, 그 무례한 남성이 지하철에서 내리고 주인공으로 보이는 듯한 여자가 따라 내린 장면에서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해 읽기를 멈췄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내 마음속 파과의 세계는 2박 3일 동안 지하철에서 염병을 떠는 꼰대 남성에게서 멈춰져 있었다. 제발 죽기를 바라며. 그리고 돌아오는 기차에서 채 두 페이지도 가지 않아 남자는 죽어버렸다. 조금만 더 읽으면 시원하게 2박 3일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그간 개손해를 봐버렸다.
이처럼 파과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루기도 하지만,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는 비정한 현대의 세계를 잘 보여주기도 한다. 남자가 쓰러지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어깨를 친 남자를 탓하듯 바라보는 시선, 길에 쏟아진 폐지를 함께 줍는다면 상황이 더 빠르게 정리될텐데도 가만히 지켜보면서 클락션이나 울리고 있는 사람들, 나이 든 여자를 '어머님'이라고 퉁쳐버리는 무례함과 젊은 사회초년생이 네일숍에 들어와 벌어졌던 상황들까지. 때문에 이 소설이 단 두 사람만을 조명하지 않고 이 사회 전체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각이 류와 강 박사에게 느낀 끌림, 그리고 투우가 조각에게 보인 비이성적인 집착은 발산의 결과가 다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트라우마나 결핍에 대한 유혹이 아니었을까? 그래서인가, 소설에서 풀어나가는 인물들과의 관계가 그다지 로맨스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조각은 어렸을 적부터 소위 돼지처럼 자식들을 많이 낳아놓기만 한 가정에서 태어나 떠밀리듯 다른 친척집에 맡겨져 시다바리를 하면서 평화로운 가정을 동경했었다. 하지만 한순간의 실수로 쫓겨난 조각의 인생은 돌이켜보면 그다지 자신의 자의적으로 흘러가지 않은, 사라지지 못해 살아진 삶이었다. 류를 만난 이후에도 조를 바라보며 느꼈던 죄책감과 함께 행복했던 기억도 잠시, 조는 결국 아이와 함께 죽고 말았고 류 또한 폭탄 앞에서 조각을 감싸 죽고 말았다. 소중한 이들을 잃고 소중한 것을 만들지 말자고 했던 류. 그리고 소중했던 류를 잃고 만 조각은 그 이후에도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비정한 조각에게 강 박사는 아무런 이유를 묻지도 않고 묵묵히 그를 치료해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품에 온갖 흉기를 품고 있고 피투성이가 된 채 자신을 찾아온 수상한 여자를 치료해 주고도 아무것도 묻지 않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의심의 눈빛은 보내지 않을까? 하지만 그저 묵묵히 치료해 주고 건강만을 신경 써준 강 박사에게서 조각은 인생에서 쉬이 만나보지 못했던 다른 세계의 이면을 만났다. 차가운 얼음판에 따듯한 봄바람이 닿아 저도 모르게 조금씩 녹아가듯 조각은 변화했다.
때문에 킬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책에서 내가 기대한 바만큼 아찔하고 크나큰 사건이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초중반부는 대체로 은퇴를 앞둔 조각의 변화가 느껴졌다. 겉으로든, 내면적으로든. 나는 이 감정선의 변화가 제법 이해가 갔다. 조각은 이미 따듯한 가정환경을 그리워해왔고 자의가 아니었던 인생의 길에 들어서 한길로만 걸어왔으니. 강 박사와 그 가족이 보인 따스함은 그녀가 느끼기에는 남달랐을 것이다. 조와 갓난아이가 죽던 날 임무를 수행하느라 집에 일찍 들어가지 못했던 그날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평생을 죽음의 순간 속에서 살인을 업으로 살아왔던 조각은 마침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걸었다.
반면 투우는 몸이 이곳저곳 망가져가고 있는 조각과는 달리 젊고 팔팔한 남성 킬러다. 그는 유달리 조각을 귀찮게 굴고 그녀를 깔보곤 했는데 그 이유는 사실 어릴 적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자리를 떠나던 젊은 날의 조각이 '다 잊어'라고 속삭였던 마지막 말과는 다르게, 투우는 평생을 그녀의 말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그는 왜 그렇게 조각에게 집착했을까? 가족을 망친 원한? 아니면 가족보다도 자신을 더 챙겨주었던 가정부에 대한 애착과 그리움? 자신의 인생을 이지경까지 몰고 온 인물은 죽을 때까지 완벽해야 한다는 발상일까? 아니면 조각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걸까? 투우의 정확한 마음을 헤아릴 수는 없지만 트라우마가 페티시로 진화할 수 있다던 SNS의 우스갯소리가 생각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투우의 경우가 바로 이에 합당한 케이스인 것 같았다. 각자 생각하는 이유가 다르겠지만 일단 나는 아무리 봐도 '나의 인생에 큰 자국을 남긴 조각이 킬러로서 필요 없는 인간미를 품고 킬러의 자격과는 동떨어진 늙은이로 쇠락해 가는 게 보고 싶지 않다'라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다. 나이가 30대지만 투우도 참 미성숙한 어른이다. 사실 어릴 적에 그런 경험을 하고 제대로 된 정신적 치료를 받지 못했더라면 트라우마가 오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대부분의 작품에 정신병원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관인 뮤지컬로 만들기 좋은 작품이었을지도. 하지만 아무리 그런다 해도 애를 괴롭힌 건 최악이다. 지인은 이 투우 캐릭터가 인기가 많을까 봐 걱정하던데 (ㅋㅋ) 나는 워낙에 이렇게 여자 캐릭터한테 성가시게 구는 남자 캐릭터는 별로라서··· 영화가 개봉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요?
엔딩은 사실 어느정도 예상이 갔다. 아무래도 고군분투 끝에 투우가 죽고 조각이 살거나, 내지는 둘이 피 터지게 싸우다가 둘 다 죽는 엔딩을 생각했었고 전자에 더 비중을 두고 있었다. 근데··· 출발하기 전에 무용이가 죽더라. 그 직전에 일이 해결되면 무용이랑 산책을 가겠다는 둥 플래그를 세우다가 무용이까지 죽어버려서 설마··· 싶기는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인간이 먼저 죽어서 개가 남겨지는 것보다는 개를 먼저 보내주는 게 나을 테니까. 그리고 무용이도 평화롭게 떠난 것 같으니 받아들이기로 했다(안 받아들여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지만서도).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그래서 아직은 류, 당신에게 갈 시간이 오지 않은 모양이야.
노년의 나이. 한때는 업계를 휘어잡으며 유명한 손톱이 되었다가 한 손 없이 황혼기를 맞이하게 된 조각. 빛나는 황금기를 떠나보내고 이제는 누군가에게 '어머님' 소리를 들으며 평범함으로 스며들어간 조각. 하지만 나는 내 머릿속에 그려지는 내가 모를 젊은 시절의 조각의 인생보다도 나이를 먹고 세상과 어울리게 된 지금이 더욱 풍족해 보였다. 막 익은 복숭아보다도 약간 짓물러 푹 익어버린 복숭아가 더욱 부드럽고 달콤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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