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툴루의 부름] The Things We Leave Behind(우리가 남기고 간 것들) - Forget Me Not(나를 잊지 마) 플레이 후기
REVIEW/TRPG REVIEW 2023. 7. 31.
The Things We Leave Behind(우리가 남기고 간 것들)
Forget Me Not(나를 잊지 마) 플레이 후기
카오시움의 공식 크툴루의 부름 출간작이 아님에도 상당히 좋은 평을 받고 있는 Stygian Fox (스티쟌 폭스)의 The Things We Leave Behind. 수록 시나리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Forget Me Not은 정말 몇 년 동안 플레이할 기회가 없이 바라고만 있던 시나리오였는데요, 이번에 북극여우 님께서 감사하게도 Forget Me Not을 마스터링해주셔서 오래 묵은 숙원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Forget Me Not
- Stygian Fox, The Things We Leave Behind 수록
- 저자: Brian M. Sammons
- 단편 시나리오
- 판매링크: https://www.drivethrurpg.com/product/191250/The-Things-We-Leave-Behind--An-Anthology-of-Modern-Day-Call-of-Cthulhu-Scenarios
- 플레이 일시: 2023. 5. 20. ~ 2023. 5. 21. (2일)
- GM: 북극여우
- PL: 삼(그레첸 노우드) | 야빈(미나 오) | 에퐁(이븐 힐드레드) | 혼또(카밀라 올슨)
─개요
모든 탐사자는 초저예산 유령 사냥 TV 프로그램인 '더 수퍼내추럴 파일(The Supernatural File)'을 촬영하는 멤버 중 한 명입니다. TSF는 미국 케이블 방송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자연 현상을 다루는 리얼리티 쇼입니다. TSF 멤버인 여러분은 밴을 타고 옥수수밭이 불온하게 흔들리는 미국의 도로를 달리고, 바로 그 시점부터 시나리오는 시작됩니다.
스티쟌 폭스는 크툴루의 부름 비공식 시나리오를 출간하는 서드 파티로, 가끔 카오시움의 크툴루의 부름 공식 시나리오 작가들도 함께 참여해 시나리오집을 출간합니다. The Things We Leave Behind의 경우에는 칠흑보다 검은 것(어둠으로 가는 문 수록 시나리오) 작가인 Brian M. Sammons와, 비관의 마을(이름 없는 공포들), 공간에 관하여(이름 없는 공포들), 블랙워터 크리크(크툴루의 부름 스크린 팩) 작가인 Scott Dorward가 함께 했습니다. 그외 스티쟌 폭스에서 출간한 다른 시나리오집에서도 종종 카오시움 공식 시나리오 작가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왜 이렇게 따로 서드 파티로 출간하는지는 모르겠어요!
*스티쟌 폭스 시나리오집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에게는 미스카토닉 계곡의 새로운 이야기 New Talesof the Miskatonic Valley도 추천드립니다. 마찬가지로 Oscar Rios, Christopher Smith Adair 등 공식 시나리오 작가가 참여했어요. 수록된 6편의 시나리오 모두 번역했는데 퀄리티가 좋습니다. 러브크래프트 세계에 등장하는 고유 도시들을 배경으로 하는 1920년대 시나리오집입니다.
https://www.drivethrurpg.com/m/product/299661
아무튼 공식 시나리오 작가들이 참여하는 만큼 어느 정도의 기준 이상의 퀄리티는 갖추고 있으리라 생각하기도 했지만, 주변에서 먼저 Forget Me Not을 다녀오신 분들의 평이 대체로 좋았습니다. 또한 크툴루의 부름을 오래 플레이한 분들이 모여 있는 해외 포럼인 요그소토스 닷컴(Yog-sothoth.com)에서 괜찮은 크툴루 시나리오 추천 스레드가 올라오면, Forget Me Not은 공식 시나리오가 아님에도 언제나 목록에 이름을 올리곤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나온 다양한 공식 시나리오에 견주어 보아도 부족함이 없거나 혹은 그 이상의 평을 받고 있는 것이죠.
항상 CoC 공식 시나리오를 플레이하기 위해 번역을 하고 마스터링을 많이 하는 편에 속하던 저로서는 이렇게 온라인 세션으로 원하던 단편 시나리오의 마스터링을 받아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요즈음에는 주로 마스터로 참여하든 플레이어로 참여하든간에 오랜 시간을 들이는 캠페인 세션을 많이 했었거든요. 덕분에 플레이 예정일 훨씬 전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탐사자를 만들어두었습니다.
◈ 스포일러 없는 세션 후기
TSF의 다양한 역할들 중에서, 저는 방송 진행자를 맡았습니다. 왜 선택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말 그대로 세션 내에서 '방송 진행'을 맡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해요. 원래 시나리오에서 상정한 방송 진행자는 초저예산 프로그램을 만드는 무명의 누군가였겠지만(아마도), 저는 탐사자를 그저 오컬트에 관심이 많아 TSF 프로그램을 즐겨 보고 있었고, 때문에 팬심에 기반해 자발적으로 프로그램에 참여한 인지도 있는 배우로 설정했어요. 배우 활동을 하면서 이면에서는 신화 사건을 뒤쫓는 비밀 탐사자 집단 소속으로 할까 생각도 했지만, 너무 과설정 같기도 하고 이미 있는 타 작품이랑 설정이 겹쳐버리는 것 같아서··· 기존의 설정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요즘은 캐릭터의 특징적인 면모와 함께 시나리오에 무리없이 참여할 수 있을 성격이나 계기 등을 만들어두고 있어서 다른 캐릭터들과 큰 마찰이 빚어지지 않게 순한 성격으로 정했고(물론 전 세션 내 갈등도 꽤나 좋아하지만), 초자연현상을 다루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입장인 만큼 오컬트에 관심을 많이 두었어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목격하더라도 관심을 갖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게!
그런 캐릭터로, 어렸을 때 미국으로 건너와 한국인 이민자로서 살아가며 카메라 감독이자 음향 감독이자 조감독··· 기타 등등의 모든 일을 맡으면서도 언제나 밝고 명랑한 미나 오, 그로스를 목도한 동생을 돌보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초자연적인 현상을 연구하는 신비학자 카밀라 올슨, 그리고 초자연 현상을 믿지만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생물화학공학 교수인 그레첸 노우드와 함께 탐사하게 되었습니다. 미나는 정신력이 90, 카밀라는 교육이 90, 그레첸은 교육이 85였어서 연예인 직업은 분명 제가 맡았는데 왠지 잘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끼인 일반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시나리오는 미국의 도로를 달리던 차량 안에서 시작됩니다. 늘 이런 시나리오를 할 때마다 느끼지만, 특유의 미국식 호러에서 볼 수 있는 그만의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처음부터 이야기 속으로 몰입하게 되는 도입부. 조사를 해야 하는 구간과 기이한 사건을 맞닥뜨리게 되는 구간의 조합. 그리고 Forget Me Not이라는, 시나리오의 제목은 무슨 의도로 붙여졌을지? '초자연 현상 프로그램 촬영'이라는, 어찌 보면 공포 소재로서는 흔한 주제를 바탕으로 내용이 어떻게 될까, 탐사자들은 어떤 행동을 할까? 따위의 추측을 해보았는데, 예, 언제나처럼 추측은 빗나갔지만 여러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과정은 당연히 재미있었어요.
플레이하고 나서 이 시나리오가 칠흑보다 검은 것을 출간한 작가와 같은 작가라는 걸 알았을 때 아, 납득이 가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레일로드는 아니지만, 탐사자들이 신화적인 사건을 맞닿뜨리고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나아가는 단계들이 잘 정돈된 느낌이에요. 호러 룰의 특성상 시나리오를 작성할 때 놓아줄 땐 놓아주고 몰아붙일 땐 몰아붙이는 완급조절이 상당히 중요하고 이 부분이 세션의 긴장도와 재미로 직결된다고 생각하는데, 이 부분을 잘 버무려두었고, 여우님께서도 이 부분을 많이 고심하시고 진행하시는 게 느껴졌어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마스터 님께서 탐사자들이 시나리오에 잘 녹아들 수 있게 탐사자들의 백스토리를 세심하게 조정하고, 배치해주시고 어떨 때는 과감히 손을 대 주셔서 더욱 풍부한 경험을 즐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어찌 보면 탐사를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 수 있었는데 이 부분을 짚어두셨는지 탐사자가 어렵지 않게 조사를 지속해나갈 수 있었어요(물론 없었더라도 머리채 잡고 끌고 오긴 했겠지만).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하는 호기심과 함께, 만져주신 백스토리 내용으로 탐사자가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할까 고민하는 순간이 즐거웠어요.
한때는(이라고 해봤자 벌써 n년 전) A세션에 데리고 갔던 탐사자를 B세션에 굴리는, 소위 고정 탐사자를 굴리는 일도 많았는데, 어느새부턴가 마스터가 제가 짠 캐릭터의 백스토리에 손을 대었을 때 시나리오의 내용이 풍부해지고 캐릭터와 이야기가 더욱 조화롭게 섞여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는 이 맛을 참을 수가 없네요······. 결국 마스터가 만져준 나의 캐릭터도 내가 즐길 수 있는 컨텐츠의 한 요소가 되어주는 것 같아요. 그 외에도, 시나리오에 대해 추측할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을 넣어주셔서 더욱 소름 돋고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그에 더해진 정말 다양한 BGM과 탐사자가 행동할 때마다 나오는 적절한 효과음들, 불안이 내려 앉은 주변 풍경의 묘사와 머리로 그려지는 듯한 상황적 연출이··· 세션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면서 영화를 찍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시나리오 자체의 내용에서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비록 마스터께서 걸러주셔서 제가 플레이에서 직접 겪은 내용은 아니지만 현대의 감수성으로는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아, 마스터링을 하게 될 때 해당 요소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듭니다. 대체 시나리오 작가들은 왜 이러는 걸까요? 이런 요소가 정말 심심찮게 나오네요.
또 하나, 공포 룰인 만큼 세션을 진행하다 보면 의도치 않게 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을 직면하게 되고, TRPG의 특성상 그러한 상황을 제 3자의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탐사자에게 쉽게 감정 이입해서 부담이 가는 경험이 많은데, 이번 세션도 마찬가지로 주변에서 많이 배려해주시고 생각해주셔서 무사히 엔딩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감사드려요.
이하 내용에서는 스포일러가 존재하며,
Forget Me Not을 플레이하실 예정이신 분들에게는 열람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Forget Me Not
Forget Me Not. 나를 잊지 마, 라는 말을 우리에게 던지고 시작하는 시나리오. 사실 시나리오를 플레이하기 전에 시나리오의 제목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미리 만들어두었던 캐릭터 시트가 어느새 롤20에서 사라져 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세션이 시작되고 크레딧이 올라가며 충돌하는 소리가 울려 퍼질 때, 그리고 돌려받은 캐릭터 시트의 이름이 ?? ????로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부터 시나리오의 제목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됩니다. 사고를 당했구나, 기억을 잃어버렸구나! 나를 잊지 말라는 건, 내가 기억을 잃어버렸나보다!
늘 생각하지만, CoC는 새로운 신화생물을 창작하지 않고 기존의 신화생물을 사용해 시나리오의 내용을 짜고 세션을 진행한다는 가정 하에, 같은 소재를 다루더라도 이를 어떻게 연출하느냐가 스토리에 대한 집중과 흥미를 이끌어낸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여러분은 도랑에 빠진 밴에서 정신을 차립니다, 기억은 없어요.' 보다는,
플레이어의 손에서 탐사자 시트를 회수하고, 설명보다는 귀로 '무슨 일이 벌어졌구나'하는 직감을 유도하고, 내가 지어두었던 이름들이 사라진 일련의 과정 속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몰입하게 만드는 연출. 그리고 '그저 도랑에 빠졌을 뿐이지만', 기울어진 차체에서 오감만을 의지하며, 어쩌면 높은 곳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위태로운 분위기의 조성.
물론 시나리오의 구조 자체가 0에서부터 시작해 천천히 100으로 고조되는 형식이 아닌, 일단 저질러놓고 시작하는 도입부인 만큼 다른 시나리오보다 흥미 넘치는 시작을 제공하지만, 마스터 님께서 이러한 도입부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연출할지, 어떤 식으로 정보를 제공해야 플레이어가 보다 즐겁게 호러 룰을 즐길 수 있을지 많이 신경써주신 게 느껴졌어요. 신경 쓰신 만큼, 네, 아주 효과적으로 당했다···
탐사자 네 명이서 모텔의 102호, 103호, 104호, 106호를 쓰는데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넘어갔던 105호의 존재, 그리고 Roll20의 맵에 깔려 있던 5인 전용 맵시트, 비어있는 한 자리. 사실 우리와 함께 하다가 사라져 버린 그 사람은 야빈님 캐릭터의 쌍둥이 동생이자, TSF의 작가였다는 설정. 그러한 요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시나리오가 시키는 대로만 돌린다면 첨가할 수 없는 부분이겠죠.
이미 벌어진 일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시나리오는 점차 공포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흘러가지 않고, 이미 공포가 닥쳐온 이후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분명 내가 무슨 짓을 했지만 기억해낼 수 없는 상황이, 미지로부터의 공포라는 크툴루의 부름 테마와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사실 기억 상실이라는 소재는 아주 흥미로운 소재면서도 마스터가 이를 다루기에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요. 기억 상실 요소에 플레이어와 마스터 간의 합의가 없었고 그저 시나리오에서 몰래 집어넣어야 하는 요소라면, 마스터는 기억을 잃은 기간 동안 캐릭터가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 홀로 설정해줘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해당 탐사자가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예상해서 스토리를 짜 두어야 하고, 그 탐사자를 맡은 플레이어가 마스터가 만들어낸 스토리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세션이 원활하게 흘러갈 테고요······. 만약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물론 이번에 Forget Me Not을 함께 했던 분들은 오랫동안 보아왔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 대해서 (저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요. 오히려 좋았다고 말하고 싶어요. 사실은 미나 오의 쌍둥이 여동생이 TSF 작가였고, 몇 시간 전까지 우리와 함께 있었으며, 그 여동생은 완전한 타인이 아니라 제 탐사자, 이븐 힐드레드와 몰래 사귀던 연인 관계였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가 제게는 시나리오의 가장 큰 하이라이트였어요. 아마도 동굴에서 처음부터 끝까지의 모든 기억을 떠올릴 때가 메인 기믹의 피날레였겠지만, 오히려 저는 모텔 방에 들어가는 순간 플래시백을 겪고, 그 사람이 저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을 105호의 손님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순간이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어요. 이게 다 마스터가 멋지게 개변해주신 덕분입니다.
또한 ···솔직히 말하자면 시나리오만 놓고 보았을 때, 저는 단순히 직장 동료 수준의 연을 가진 팀원 하나가 폐가에서 실종되었고, 우리가 폐가에서 뛰쳐나온 이후로 이상한 덩어리를 토하는 등의 신체적인 문제를 겪고 있으면 절.대.로. 그 폐가에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어요. 보통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신체 이상의 해결법을 문제의 근원일지도 모르는 폐가에서 찾지는 않을 것이고, 사람이 실종되었다면 경찰을 부르고 기다리겠죠. 그 사람이 1분 1초라도 더 빨리 찾아야 하는 소중한 사람이 아니라면요.
다행히 그 '실종된 동료'가 제 탐사자의 연인이라는 설정을 마스터께서 넣어주신 덕에, 중간에 이탈할 위기···가 다른 이유로 있기는 했지만 그건 광기의 문제니 차치하고! 설정상의 문제로, 탐사할 이유가 확고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는 벌어지지 않았어요. 물론 탐사자가 납득하지 못하더라도 세션 진행을 위해 플레이어가 어떻게든 머리채를 잡고 클라이맥스를 향해 끌고 갔겠지만, 여우님이 캐릭터의 서사를 잘 얽어두신 덕에 편히 플레이했어요.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마스터가 있다니 정말 행복합니다······. 새삼 포겟미낫을 플레이하면서 왜 캐릭터를 함께 짜야 하는지, 기존의 탐사자가 아닌, 시나리오를 위한 캐릭터 메이킹이 왜 중요한지를 돌이켜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TSF 팀원이 사라진 걸 깨닫고 폐가로 향하는 과정 사이에 기록 일지를 따라 마을 사람들을 조사할 수 있는 단계가 있다는 건 여우님이 추측하신 대로 저도 눈치채고 있던 부분이었는데요. 워낙 상황이 시급해서 이 상황 속에서 사람들에게 물어보러 다니는 게 상황상 맞지 않고, 사실 열심히 물어보더라도 기억에 대한 확정적인 단서 또는 해결방법이 튀어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어차피 핵심은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을 쿠퍼 가에 있을 테고, 그곳에서 결국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정보가 주어지고 시나리오의 흐름이 물살을 탈 것 같아서, 그래서 바로 쿠퍼 가로 향하고 싶었어요. 제가 플레이 하면서도 늘 이런 쪽을 생각하다 보니 ···하지만 여우님도 플레이 할 때 그렇게 생각하셨죠?
기억의 공백은 정말 치명적이네요. 바로 직전까지 경험했던 것들이 미지의 것으로 빠져들고,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을 의심하고, 결국은 나 자신까지 믿을 수 없어지는 상황은 플레이어적으로 단순히 신화생물을 마주치는 순간보다 더 무서웠어요. 내 안에 무언가가 있다니··· 사실은 거미라고 해서 아틀라치 나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친구가 나와서 띠용했어요. 예상하지 못했던 이유는 ··· 그 신화생물은 성산시 시립 도서관 정책 하에 사용하지 못하는 신화 생물로 알고 있어서요. 외국은 또 다른가?
그 거미 신화생물로 인해 제 탐사자에게 거미 공포증이 생겨버렸고··· 덕분에 '나는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괜찮지 않은 소재'에 대한 경험이 추가되고 말았습니다. 주변 분들은 잘 알고 계시겠지만 제가 곤충에 대한 공포증이 심하거든요. 공포증을 얻었을 때에도 사실 괜찮았는데, 공포증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만약 내 안에 그런 게 있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하는 걸 떠올리다 보니···(이게 화근)······
캐릭터를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움직일 수는 있을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물론 현실은 현실이고 가상은 가상이니 게임적으로 간단히 다뤄도 되는 문제지만 제 개인적인 상황이랑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 보니 이를 완전히 떼어내고 생각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아요. 사실 다른 시나리오에서 거미나 기타 곤충이 텍스트로 나오는 정도는 괜찮았거든요! 그런데 TRPG가 아무래도 이입하는 취미다 보니··· 순식간에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감사하게도 공포증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제안도 해주셨지만 아무래도 공포증을 얻은 이후 진행된 스토리가 있다 보니 너무 뒤늦게 설정을 급 바꾸는 게 아닐까 싶어서··· 흑막의 집에 찾아가서 해결법을 얻는 과정은 다른 탐사자들이 하는 걸 지켜보고 제 캐릭터는 얌전히 밴에 태워뒀어요. 괜히 제가 참여도 못하고 보고 있다고 절 너무 신경쓰지 않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는 보는 것도 정말로 재미있었거든요. 제가 신뢰하는 분들이니 부담 느끼지 않고 밴에 남겠다고 할 수 있었던 거니까요! 양해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엔딩
다행히! 아이호트의 자식을 몸안에서 끄집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주문까지도 아이호트 소환 확률을 넣어놓다니 이 사악한 작가 같으니··· 사실은 자신의 몸 안에서 벌어진 일에다가 의료적 도움도 못 받는 상황, ···그러한 이유로 이름 없는 공포들의 분위기처럼 돌이킬 수 없이 파멸로 끝나는 엔딩이려나 했는데, 다행히도 돌파구가 있었네요······.
오컬트에 관심이 많았던 이븐 힐드레드는 앞으로 오컬트에 대한 관심을 끊고 살아갑니다. 잠깐동안 요양을 다녀오고, 정신과를 다니면서 거미에 대한 공포증도 치료하겠지만 거미에 대한 완전한 공포심을 지워내지는 못할 것 같아요. 그리고 아이호트가 속삭여준 꿈의 내용을 이따금 떠올리며, 자신의 핏줄에 의문을 품을 때도 있겠죠.
어찌 됐건 클리오 시에서 있었던 일, 세나 오의 마지막 모습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거예요.
오랜만의 온라인 단편 세션이었고, 짧은 시간 안에 시나리오에 맞춰진 탐사자로 화끈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세션이었어요.
다음에도 함께 크툴루의 부름 해주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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